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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선인봉 측면길

by 안그럴것같은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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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위열전36/도봉산 선인봉 측면길
온몸을 비벼 오른반세기의 이정표

글·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sohnbal@orgio.net

다시 봄이 오는데 미적미적 글쓰기를 미루고 있었다.
흔적도 없이 시간이 가고 어느새 마감이 임박해 왔다.
애써 지난 일을 떠올려보지만 사람의 기억이란 메모지 한 장보다 나을 게 없다.
취재수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둔 곳을 알 수가 없다.
‘혹시 기록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설픈 소설이라도 써볼 요량으로 폐기한 수첩을 뒤졌는데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찾던 내용이 있었다.
‘측면길 211번째 등반.’ 용케 찾아낸 수첩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지난해까지 문남길씨가 선인봉의 측면길을 오른 횟수다.
30년 가까이 참여해온 한국등산학교 과정에서 그리고 지인들과 함께 한 등반이 어느덧 그렇게 된 것이다.
그에게 등반은 곧 삶의 방식이었고 40년 넘도록 끝나지 않은 만행(萬行)이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화려한 경력을 수식할 만한 등반기록은 없다.
집요했던 행위에서 오로지 자유 하나만을 갈구했음이 느껴진다.
문남길씨는 젊은 프랑스 친구들을 데리고 측면길에 나타났다.
무술을 배우러 온 문하생들이었다.
사단법인 한국무술협회 공인 9단인 그는 프랑스 무술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듯 했다.
등반은 담력을 키우는데 제격이고 담력은 곧 무술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들이 장비가 있건 없건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그는 선등으로 오를 생각이었겠지만 10여 년 전 위 절제수술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발도 약간씩 절었다.
“스키 타다가 근육이 늘어났어. 지난 1월에 샤모니에서 그랬지….”
궁금해 하는 눈치를 채고 그가 말했다.

211번째 오르는 측면길

떠도는 삶에서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 문남길씨에게 선인봉은 귀소본능의 귀착점이었다.
그중에서도 측면길은 가장 마음 편한 곳이었다.
그동안 이 곳을 함께 오른 사람은 77살 노년의 의사, 프로레슬러, 스님, 그리고 조르쥬 파이요와 이본 취나드 같은 유명 산악인도 있었다.
파이요는 1971년 10월, 한국산악회가 알프스 등반기술의 연수를 목적으로 프랑스에 대원들을 파견했을 당시 담당 교수였고 지금도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안나푸르나를 초등한 모리스 에르조그가 교장으로 있던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ENSA)에서 한국산악회원들이 받은 위탁교육은 그 당시 산악계 최초의 공식적인 등산유학이었다.
8명의 훈련대원이었던 전담(대장)·이재인·한덕정·조천용·백인섭·이강오·진교춘·구인모씨 등이 그곳에서 40일간의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익혀온 프렌치테크닉과 프런트포인팅 기술은 국내 빙설벽 등반기술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며 산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산악인에게 알프스의 의미는 더없이 특별하다.
그러나 히말라야도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는 지금의 분위기로 알프스를 꿈꾸던 정서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알피니즘 마저 의심해 보게 되는 자의식이 강해진 현 단계에선 그렇다.
어쨌거나 알프스엔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당대의 별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들의 체취가 있는 알프스는 향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고 문남길은 그런 알프스를 동경했다.
한국산악회 2차 알프스 훈련대의 김인섭·김항원·유재원·차양재 등이 파견되고 2년 후인 1974년에 문남길은 처음 알프스로 날아갔다.
그는 운 좋게도 아주대학교 교수인 볼보자스키의 주선으로 ENSA에 입학하게 되어 샤모니에서 1년쯤 머물렀다.
그리고 거기서 15개쯤의 봉우리를 올랐다.
그때 유재원과 차양재는 이미 체류 기간을 넘기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알프스에서 6년을 거주하며 추구한 23개의 등반에서 15개가 단독행이었던 유재원의 삶은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결국 1977년 에귀 노아르 드 퓌트레이 등반을 끝으로 사라져갔다.
눈사태로 추정되는 사고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문남길의 샤모니 행은 그치지 않았다.
에코클럽의 유기수·김종욱·백성현, 은벽산악회의 후배 허정식과 함께 드류 서벽에 도전하는 등 오히려 기세를 더 높였다.
한국의 산악인들을 자식처럼 아끼던 띠띠네 집을 오가며 가스통 레뷔파·르네 드메종·리카르도 캐신·라인홀트 메스너·실뱅 소당·야닉세뇨리·모리스 에르조그·크리스 보닝턴 등 세계 등반사를 빛낸 거물들과도 조우하게 되었다.
어느덧 샤모니는 고향처럼 친근한 곳이 되어갔다.
211번째 측면길 침니에 몸을 비비는 그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의 뒤를 따라 오르는 프랑스 친구 파브릭스(30세)와 밥티스트(24세)도 신기하리만치 겁을 내지 않았다.
모두들 6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사범급 무술의 소유자다웠다.
그러나 둘째마디 뜀바위 앞에서의 망설임은 어쩔 수 없다.
피레네가 고향인 파브릭스가 먼저 엉거주춤한 자세로 뜀바위를 건넜으나 밥티스트 역시 망가지는 자세를 보이고 만다.
역시 산은 산이고 무술은 무술이다.
겨우 그곳을 건너 꼼짝 않고 처분을 기다리는데 이번엔 반반한 반침니(off width crack)가 기다리고 있다.
일명 계란바위다.
이곳을 알바위 또는 참기름 바위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미끄럽다는 뜻이다.
그곳을 먼저 비비고 넘어간 후 넒은 침니에 도달한 문남길씨의 완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려움은 끝났다 싶었는데 어디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반대편 S침니 방향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가 어디라니. 여기가 여기지.”
“아니 무슨 길이냐고요?”
“여기가 측면길이지요. 그런데 어디에서 온 거요?”
“선·인·봉.”
우문인지 선문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이다.
이들이 요즘 바위를 주름잡는 ‘줌마씨(아줌마 아저씨)들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하나의 정상보다 여러 루트를 횡단하며 퓨전을 즐기는 사람들.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은 그들에게 별 재미없는 일이다.
나름대로 의미 있고 유쾌한 등반을 즐기는 것이 목표일뿐이다.


김정태와 엄흥섭씨가 초등반

측면길은 1938년 4월 김정태와 엄흥섭 등이 초등한 코스로 전해진다.
지난 반세기 동안 김정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선구적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어떠한 산행에서도 반드시 깨알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행동이 앞선 사람에게 부족하기 쉬운 사색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그에게 있었다.
1988년 1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진부령 스키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50여권의 등반수첩을 접한 일이 있었다.
언제 어느 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심지어 누구에게 신세진 일까지도 거기에 소상히 적혀 있었다.
한국의 초기 산악사를 돌아볼 때 반복해서 되뇌어도 좋을 만큼 김정태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1916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1929년 백운대에서 처음 바위를 접한 이후 평생 산을 올랐다.
한국 산악운동의 핵심 무대인 인수봉과 선인봉의 정면벽도 그에 의해서 초등반 되었다.
1937년 한인들의 조직 백령회와 1945년 한국산악회, 그 이듬해 대한스키협회 창설도 그의 기획과 실행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등산가로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한 가지 슬픈 일이 있다면 산 때문에 돌볼 수 없었던 가정과 경제적 궁핍이었다.
한국산악회 일로 김정태씨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원로산악인 손경석씨는 그에게 삼한(恨)·삼희(喜)·삼호(好)가 있다고 표현했다.
좋아하는 일 세 가지 삼호는 커피와 노래와 사진이었다.
늘 현장에서 등반을 진두지휘한 야전사령관인 그는 커피를 특히 즐겼다.
노래를 좋아함은 언제나 흥이 있음이었고 사진을 좋아한 것은 기록에 철저한 습관과 진취적 취향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세 가지 기쁜 일은 1942년 연초에 성공한 백두산과 마천령산맥 동계등반, 대관령을 스키장으로 개발한 업적,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수상한 서울시문화상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에게는 세 가지의 한이 남아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산을 떠나지 않았지만 1948년 한라산 동계등반에 참가하지 못했고 1960년 스키협회의 첫 올림픽 출전 때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은 1982년 한국산악회 마칼루 원정 때 신체적 경제적 이유로 대장을 맡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를 만나면 항상 어디론가 떠날 계획이 세워졌고 그와 함께 하는 동료들은 그의 단단한 의지와 강건한 육체에 감화되어 늘 들뜨게 되는 경험을 했다.
단 한번이라도 그와 같이 산행을 한 사람은 그때의 일을 무용담으로 간직했다.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산악회 사무실에 출근하여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늘 책을 읽고 기록을 정리하던 모습을 보였다.
이미 그의 전성시대는 흘러갔지만 산악회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으로 마지막 그의 열정은 타올랐던 것이다.
늘 산을 이야기 하고 산을 생각하게 하는 김정태는 탁월한 등산가이자 실천가였으며 그 자신이 하나의 우뚝 선 산이었다.
참기름 바위를 올라서니 여기가 어디냐고 묻던 사람들은 테라스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슬랩 아래로 사라져 가고 우리가 그곳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제 불안감은 말끔히 사라졌다.
처음 측면길에 온 프랑스 친구들도 쉬워진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희희낙락하다.
초등반 당시 김정태씨는 직상하여 정상으로 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좁아지는 크랙에 볼트는 물론 없었고 당시로서는 인공등반도 불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간 부분의 로프에 의지하여 밑으로 내려온 후 동굴을 통해 정상으로 갔다.
문남길씨 역시 크랙으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나갔다.
오른쪽 슬랩은 그의 불편한 다리로도 어렵지 않게 횡단할 수 있었고 그 것으로 사실상 측면길 등반은 종료되었다.
이제 동굴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이곳에 서면 옛 산친구의 선인봉 첫바위 일화가 가끔씩 떠오른다.
극도로 시력이 나쁜 친구가 어느 날 선인봉에 와서 박쥐코스 날개를 꺾어 올랐다.
첫눈에, 그것도 박쥐를 올랐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월척을 낚은 듯 대견한 일이었다.
친구는 한껏 흥분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위엔 또 다른 고빗사위인 혹점 슬랩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혹점에 올라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러나 당시는 아니었다.
박쥐길을 초등반한 선우중옥씨도 바로 그곳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고 술회했었다.
슬링을 걸어 혹점을 돌파한 초등 때의 방법은 아니지만 친구는 미끄러지지 않고 그곳을 올랐다.
그런데 슬랩을 끝내고 보니 또다시 직상 크랙이 가로막고 있었다.
크랙을 오르자니 날이 저물 것 같고 그냥 내려가자니 찜찜했다.
하는 수 없이 사력을 다해 크랙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크랙을 끝냈을 때는 이미 꼼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정상이 나와야 할 곳에는 동굴이 떡 버티고 있었다.
그곳에 동굴이 있으며 그곳을 빠져나가야 정상에 오른 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오르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계산은 완전 착오였다.
결국 계획에 없는 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날 아침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하산을 했다.
아직도 어디로 올라서 어느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이고 보면 그 같은 상황이 다시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마치 미로를 찾는 게임인 양 동굴을 신기해하던 문남길의 211번째 파트너들은 계속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절묘한 바위 구조도 그렇지만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 그들의 얼굴에서 엿보였다.
석문처럼 생긴 바위 틈새를 빠져나오자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정상이었다.
벽과 벽 사이를 들고 나며 ‘입암’이라 했던 선배의 표현이 떠올랐다.
몸과 몸을 섞는 섹스의 대상으로 그 말을 헤아렸으나 오늘 보니 그 속뜻은 나눔이었나보다.
굽히고 좁히고 수그리며 온갖 자신을 낮추는 몸짓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측면길의 정상은 등정이란 말로 아우를 수 없으며 쟁취할 대상은 더욱 아니였다.
그곳은 하나의 느낌만을 공유하는 평화로운 곳이였다.


INFORMATION
선인봉 측면길 등반가이드


선인봉 측면길은 선인봉 남측 면에 뻗어있는 전체길이 150m에 일곱 마디로 되어있는 코스다.
1938년 4월 김정태와 엄흥섭 일행이 초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첫마디를 오른 후 둘째마디로 건너뛰는 지형 때문에 일명 뜀바위로도 통한다.
루트의 전체 분위기는 침니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단부는 십자 형태의 크랙이 교차한다.
난이도는 셋째 마디 계란 바위와 십자로의 여섯 마디 크랙이 5.8로 평가되어 있다.
계란바위 혹은 알 바위, 참기름 바위로도 부르는 셋째마디는 나팔형 반침니로 확보물 설치할 곳이 애매하다.
이곳은 밑에서 발을 받쳐주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만장봉 쪽으로 걸어가서 하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요즘은 전면으로 하강하여 내려오기도 한다.
측면 길의 들머리는 선인봉 전면의 왼쪽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바위지대를 향해 진입한다.
초입에서 첫마디를 올라서야 비로소 루트가 드러난다.
첫째 마디(20m) 짧은 크랙과 침니를 통과하여 왼쪽 테라스로 오른다.
둘째 마디(18m) 침니의 오른 쪽으로 건너간다, 일명 뜀바위로 부르는 이곳은 최대한 발을 밖으로 끌어내야 유리하다.
침니 사이를 건너간 후엔 칼바위의 크랙을 잼과 레이백으로 오른다.
셋째 마디(15m) 달걀처럼 매끄러운 면 때문에 계란 또는 알·참기름 바위로 부르는 짧고 좁은 반침니를 올라 테라스에서 확보한다.
크랙에 확보물 설치하기가 애매하여 뒤에서 받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넷째 마디(40m) 스탠스와 홀드가 많은 넓은 침니를 오른다.
다섯째 마디(20m) 깔때기처럼 좁아지는 침니를 따라 오른다.
왼쪽면의 크랙을 이용하여 오를 수도 있으며 마디 끝나는 지점에서 남측오버행의 하강길과 만나게 된다.
오른쪽 바위면을 따라 횡단하여 나가면 선인봉 정상으로 향하는 동굴로 이어진다.
여섯째 마디(20m) 십자로 형태의 반침니를 따라 오르다가 중간지점부터 계단식 스탠스가 있는 홀드를 이용하여 오른다.
일곱째 마디(15m) 넓은 크랙을 등반하여 테라스로 오른다.
정상은 S침니와 연결되는 길을 따라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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