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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에베레스트의 역사 (5)

by 안그럴것같은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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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유럽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에 드 소쉬르가 등로를 찾으면서 시작된 알피니즘은 240년의 세월의 흐름속에 끝내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게 됐다. 5대륙 6대주에 이르는 산이란 산은 모두 오르고 벽이란 벽에 길이 났다. 어제 어느 한 구석도 태고의 비밀이나 정적도 간직한 곳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세계의 등산가들의 발걸음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에베레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최고봉으로 알려진지 150년이 되며 인간이 오르기 시작한지도 80년이다. 그리고 1998년까지 그 정상에 선 자 1,052명이며 동서남북 4면으로 14개 루트가 났다. 원정대의 규모가 대원정 형식에서 소수정예를 거쳐 단독등반이 출현했으며, 전진캠프를 건설하던 정상공격법이 천막없는 설동 전술까지 갔고, 아예 17시간 안에 정상에 오른 등산가도 나왔다. 반세기 동안 쟁점이 됐던 인공산소 사용문제가 화제에서 사라진지 오래며 , 99년 5월에는 셀파 한 사람이 정상에서 무산소 철야, 21시간 30분을 머물렀으며, 산소없이 등정한 여성이 넷이나 있다. 그러나 산소통 무게도 처음 7kg이나 나가던 것이 티타늄이 나오면서 2~3kg으로 줄었다.에베레스트 도전 형식과 양상이 이토록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에베레스트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조지 말로리의 시신까지 찾았다.(1999년 5월 1일)에베레스트에 왜 가려는가? 는 물음에 󰡒Because it is there!󰡓 라고 답하고 떠났던 그는 1924년 8,500m 부근에서 어빈과 함께 실종됐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멀고 험했던 에베레스트는 이제 가깝고 쉬워졌는가? 20년 전만해도 봄,가을 두 차례 원정대가 찾아가던 쿰부빙하 지대가 오늘날 해마다 1만2천명의 트레커로 붐비며, 1996년에는 스웨덴 모험가가 스톡홀름에서 자전거로 와서 무산소 단독등정으로 명실공히 세계 최강 등산가로 등장했지만 1995년 무산소 단독 여성 등정자가 탄생했다. 지난날 메스너는 에베레스트에서 마의 길목인 아이스폴이 가장 두려웠다고 했는데, 지금 아이스폴 루트 공작이라는 말이 없어지다시피 됐다. 도대체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시기도 차례도 루트도 아무런 제한이 없이 등산가에게 완전히 개방됐다. 다만 1993년 입산료가 5만 달러로 뛴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나 1인당 참가비 6만5천 달러로 손님을 모집한 상업등반대까지 출현한 에베레스트는 이제 󰡒 highest junkyard(제일 높은 고물 집하장)󰡓 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이것이 그토록 오랜 세월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며 고고하고 준엄했던 󰡐초모랑마󰡑 󰡐사가르마타󰡑 의 운명일까 싶다.도시 에베레스트의 매력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로체,눕체, 마칼루 등의 거봉을 거느리고 그 한가운데 드높이 군림하는 그 고고함일까?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등반에 나섰던 릭 릿지웨이가 그의 등반기 첫 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에베레스트는 바위와 얼음과 눈의 덩어리 그 이상의 것이다. 그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그치지 않는다. 에베레스트는 상징이요 비유며 , 그것은 궁극으 목표이자 지고의 위업을 뜻한다.--- 고….

금세기 초엽에 시작된 이래 수많은 산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해온 세계 최고봉의 기나긴 역사를 일단 정리하며 느끼는 것은 진정한 에베레스트 원정은 그 초등부터 32년을 황무지에서 암중모색하며 방황한 영국의 10차례에 걸친 정찰과 등반활동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알피니즘의 본래의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실현했던 유일한 존재였으니까.그것은 에베레스트를 둘러싼 등반의 과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에베레스트 산록인 쿰부빙하에서 표고 7,900m로 솟은 눕체로 올라 그 칼날 능선을 따라 8,500m의 로체를 거쳐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른 다음, 역층을 이룬 웨스트 릿지로 내려오는 형식이 아닐까?이 과제가 내포하는 문제에는 등반의 어려움보다 운행상의 어려움이 더 크리라고 본다. 갈 데까지 갔다는 알피니즘의 21세기의 과제를 누가 먼저 풀는지 지켜볼 일이다.

 

부록

 

1. Sir George Everest (1760~1866)

1830년부터 1842년까지 인도측량국 장관. 히말라야 최고봉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

2. Edward F. Norton(1884~1954)

1924년 3차 원정에서 브루스 대장 와병으로 대행. 북면의 그레이트 꿀와르를 처음으로 통과, 오늘날 󰡐노튼 꿀와르󰡑 로 알려졌다. 당시 표고 8,580m 지점까지 진출.

3. George L. Mallory(1886~1924), Andrew Irvine(1902~1924)

영국 3차 원정에서 표고 8,500m부근에서 실종. 1933년 어빈의 피켈 발견. 1999년 말로리 시체발견. 힐러리, 텐징보다 29년전 말로리와 어빈이 정상을 밟았는지 오늘날 의문으로남아있다.

4. John Noel(1890~1989), David Breashears(1956~ )

에베레스트 사진 대가. 노엘은 1922년 필름 400피트가 든 무게 20파운드 나가는 카메라 장비를 가지고 노스콜(6,970m)에 올라갔다.한편 부레쉬어즈는 1996년 에베레스트 IMAX영화 제작에 성공.

4. Eric Shipton(1907~1977), Frank Smythe(1900~1949)

두 사람은 1936, 1938년 영국 원정대에 참가한 이상적인 짝으로 캠프 5까지 성공리에 진출했으나 기상악화와 십튼의 위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5. Sherpa Tenzing Norgay(1914~1986)

네팔 솔로 쿰부지방 태생. 1935년부터 여러 원정에 참가. 1953년 힐러리와 한 조가 되어에베레스트 초등에 성공.

7. Sir Edmund Hillary (1919~ )

뉴질랜드 양봉가. 1951년 십튼과 만나 쿰부 아이스폴 정찰.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성공.

8. Qu Yin-Hua(1936~ )

1960년 말로리의 북동릉을 오른 중국 등산가 셋중 하나. 유명한 제 2구간을 오를 때 친구 어깨에 올라서서 아이스피톤을 때려 박았다 그 때 친구를 생각해서 등산화를 벗은 것이 원인으로 동상을 입고 발가락을 잃어 등산을 중단했던 인물. 그들은 어둠속을 전진,5월 25일 밤에 등정. 정상 사진없이 하산. 지쳐서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야밤에야 노스콜 도착. 결국 전진캠프에서 베이스캠프까지 운반됐다

9. Jim Whittaker(1929~ )

1963년 미국 원정대 대원으로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1990년 미국,중국,소련 합동으로 󰡒Peace Climb󰡓 을 조직, 20명의 남녀 팀으로 노스콜 경유 북동릉을 따라 등정.

10. Tom Hombein(1930~ ), Willi Unsoeld(1926~1978)

1963년 서릉으로 올라 남동릉으로 하산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트래버스에 성공. 이때 8,485m 고소에서 비박, 언솔드는 발가락 전부를 잃었고 한편 홈바인은 아이젠을 벗은 다음 발을 언솔드 옷속에 넣고 동상을 피했다.

11. Doug Scott(1941~ ), Dougal Haston(1940~1977)

1975년 크리스 보닝턴 등반대에 참가, 남서벽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등산가들. 8.712m 고소에서 비박.

12. Tabei Junko(1939~ ), Phantog(1938~ )

1975년은 여성들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해로, 5월16일 일본대의 다베이 준꼬가 남동릉으로 11일 뒤 중국대의 팡톡(티베트인)이 북쪽으로 등정.

13. Reinhold Messner(1944~ ), Peter Habeler(1942~ )

1978년 5월8일, 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메스너는 2년 뒤 북쪽으로 단독 무산소 등정. 1986년에는 8,000m급 14봉 완등기록.

14. Leszek Cichy, Kzystof Wielichi (1950~ )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친 동계에 폴란드 원정대로 사우스콜 경유, 등정에 성공.

15. Edward Myslovski( ? ), Volodya Balyberdin(1949~ 1994)

1982년 소련의 첫 에베레스트 도전. 남서벽 왼쪽으로 새로운 루트개척.이때 미슬로우스키는 배낭과 장갑을 잃고 동상에 걸려 손가락 절단.

16. George Lowe(1944~ )

1983sus 가을 미국대의 에베레스트 동벽(캉슝훼이스) 루트 개척에는 로우의 공이 컸다. 눈과 바위로 된 1,000m의 급사면을 극복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성공의 길을 텄는데, 동료들은 이 벽을 󰡒 Lowe󰡑s Buttress󰡓 라고 불렀다.

17. Tim McCartney- Snape(1956~ )

1984년의 빅 뉴스는 소수의 호주 클라이머가 산소없이 노튼 꿀와르 경유, 북벽으로 에 베레스트에 등정한 일이었다. 이때 맥카트니스 네이프가 동료 그렉 모티머와 함께 등정. 1990년에는 󰡐바다에서 정상까지󰡑 라는 모험을 설정하고 산에서 600마일 떨어진 벵골해안에서 걷기 시작하여 남동릉을 거쳐 에베레스트에 다시 등정했다.

18. Peter Boardman(1950~1982), Joe Tasker(1948~1982)

1982년5월 17일.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소수 경량 등반형식으로 도전하다 실종.

19. Kato Yasuo(1950~1982)

1982년 일본 에베레스트 동계등반에서 등정 후, 하산도중 실종.이것은 그의 세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었다.

20. Sir Chris Bonington(1934~ )

영국의 가장 저명한 등산가로 특히 그의 운영과 조직 기술이 탁월.1972년과 75년에 걸쳐 에베레스트 남서벽 도전

21. Alison Hargresves(1962~1995)

1995년 여성으로 단독 무산소 등정. 메스너의 기록 후, 15년만에 등정. 이때 그녀는 북동릉에서 돌아와 수 주일 뒤 K2에 등정했으나 하산도중 강풍에 실종.

22. Rob Hall(1961~1996)

1996년 상업등반대를 조직하여 5월10일 에베레스트 등정. 하산 길에서 본인을 포함하여 손님 둘과 셀파 둘이 사망. 홀은 그때까지 다섯 번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23. Ang Rita(1947~ )

네팔의 셀파로 1983년 처음으로 남동릉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뒤 지금까지 무산소로 10회 등정하여 최장 기록을 세웠다. 그는 현재 텐징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셀파가 됨.

24. Hans Kammerlander(1956~ )

라인홀드 메스너와 같은 티롤 출신. 1996년 노스콜과 북동릉을 거쳐 에베레스트까지 무산소로 16시간45분에 등정. 하산은 스키와 아이젠을 바꾸어 가며 노스콜로 내려옴.

 

에베레스트 14개 루트

 

남쪽

 

1. 사우스콜/남동릉

1953년 영국대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셀파 노그게이 텐징.

2. 남서벽

1975년 영국대의 두갈 하스톤과 덕 스코트.

3. 남릉

1980년 폴란드의 안드레이 치와 예지 쿠크츠카.

4. 남서벽 중앙 버트레스

1982년 소련의 울라디미르 발리버딘과 어드아르드 미슬로우스키.

북쪽/서릉

 

5. 북릉에서 북동릉

1960년 중국의 쿠 인후아, 왕 후초우 그리고 티베트인 공 부.

6. 서릉/혼바인 꿀와르

1963년 미국의 윌리 언솔드와 토마스 혼바인.

7. 서릉 직등루트

1979년 유고슬라비아의 안드레이 스템펠리, 제르네이 차프로트니크.

8. 혼바인 꿀와르 직등루트

1980년 일본의 시게히로 츠네오와 오자끼 타께시.

9. 북벽

1980년 라인홀드 메스너

10. 그레이트 꿀와르 직등루트

198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팀 맥카트니와 그러그 모티어.

11. 북동릉

1995년 일본대의 후르노 키요시,이모토 시게키, 다와 체링, 락파 누루, 니마 도르제,파상 카미.

12. 시베리아 루트

1996년 러시아의 페트로 쿠즈네초프,발레리 코하노프, 그리고리 세미코렌코프.

13. 캉슝훼이스 중앙벽

1983년 미국대의 루이즈 라이하르트, 킴 몸, 카를로스 부흘러.

14. 에베레스트 버트레스

1988년 영국 클라이머 스테판 베네이블, 에드워드 웹스터, 로버트 앤더슨.

에베레스트 주요 문헌

에베레스트 도전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가운데 하나의 사료(史料)로서 요약하거나 기록으로 남겨야 할 사항들을 여기 간략하게 수록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등정에 관해서는 해당 등반대의 보고서와 네팔주재 보도원의 보고에 의하는 길밖에 없는데, 다년간에 걸친 수많은 원정에 비하면 그들이 정리해서 공표한 보고서나 등반기가 의외로 적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등반에 전기를 마련한 원정 기록물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들을 추리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 기록으로 John Hunt : Ascent of Everest

2. 1963년 에베레스트 서릉과 동남릉 첫 횡단 기록으로 Thomas Hornbein : Everest , The West Ridge

3. 1971년 국제대의 공중분해 기록인 Peter Steele : Doctor on Everest

4. 1975년 남서벽 초등 기록인 Christ Bonington : Everest - The Hard Way

5. 1978년 첫 무산소 등정 기록인

가. Reinhold Messner : Everest

나. Peter Habeler : Der einsame Sieg

6. 1980년 첫 단독등정 기록인 Reinhold Messner : Der glaserne Horizont

7. 1982년 피터 보드맨과 조 태스커를 잃은 미답루트 도전 기록으로 Christ Bonington

& Charles Clarke : Everest, The Unclimbed Ridge

8. 1996년 5월 상업원정이 부른 에베레스트 등반 대참사 기록으로 Jon Krakauer :Into Thin Air

9. National Geography Society 가 펴낸 상업등반을 중심으로 엮은 에베레스트 개관Broughton Coburn : Everest, Mountain without Mercy

10. 에베레스트 탐색부터 1997년까지의 과정을 연대별로 정리한 문헌으로 Robert Mantovani : Everest - The Story of the Himalayan Giant

 

엘리자베스 홀리 자료

 

엘리자베스 홀리( Elisabeth Hauley) 는 히말라야 기록과 밀착된 인물로 카트만두에 체류하며 로이터 통신 특파원으로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값진 존재다.그전에는 마이크 체니라는 영국인과 같이 보도활동을 했지만 체니가 죽은 뒤 홀리는 독보적인 존재로 더욱 부각된 셈이다. 그녀는 히말라야 전역에서 벌어지는 등반관련 사항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파악해서 전 세계 요로에 전하고 있는데, 1997년까지 그녀가 정리한 에베레스트 관련 주요사항은 아래와 같다.

 

1. 원정대 총수 : 391 등정대 167

 

네팔방면 : 214 120

 

티베트방면 : 176 46

 

** 두 방면 동시 오른 대는 하나

 

2. 에베레스트 정사에 선 인원은 43개국에서 676명이며 그 가운데 여성이 39명이다.또한 1회 이상 오른 사람이 90명이고 그중에 네팔 셀파 55명, 인도 2명, 기타 31명이다.하루에 제일 많이 오른 수는 1993년5월10일, 40명이고 이들은 모두 사우스콜 경유자다. 또한 93년 봄이 단일 계절 최다 인원 등정을 기록했으며 그 가운데 81명이 네팔쪽에서 올라 갔다. 등정에 성공한 131개 원정대는 노멀루트로 올랐으며, 그 중 98이 네팔쪽 남동릉으로, 33은 티베트쪽 북릉을 따라 올라 갔다. 이 가운데 한 팀이 티베트로 올라가 네팔로, 다른 한 팀은 대원들을 양쪽으로 올려 다른 쪽으로 동시에 내려보냈다.등정가 가운데 60명은 등반 중 인공산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는데, 여기에는 셀파 8명과 여성이 2명 포함되 있었다.

 

기타 잡다한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완전한 단독등정에 성공한 것은 라인홀트 메스너 한 사람뿐이다.

 

그는 1980년 8월20일 노스콜 경유 북면으로 나와 그레이트 꿀와르로 해서 정상에 올랐다. 한 사람이 제일 많이 오른 기록은 앙 리타 셀파가 세운 10회인데, 그는 1983년 5월에 처음으로 오르고 최신 기록은 49세 때인 1996년 5월 등정이다. 그는 이 모든 등정을 무산소로 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빠르게 해낸 등정은 이탈리아의 한스 카멀란더가 1996년5월24일 이룩했는데, 이 때 그는 노스콜을 지나는 노멀루트로 총 6시간45분 걸렸다. 그는 23일 오후 5시에 행동을 개시하고 24일 오전9시45분에 정상에 섰다. 출발점인 베이스캠프의 고도는 6,400m였다.

최고령 등정자는 베네스엘라에 사는 스페인 사람 라몬 블랑코로 그가 1993년 10월 7일60세 때였다. 또한 최소 연령으로는 16세의 네팔 소년 샴부 타망이며 그의 기록은 1973년 5월5일 이루워졌다.그 밖에 네팔인 아닌 최연소자 버트란드 로슈가 17세로 1990년10월7일 등정했는데, 이 때 그는 부자(父子) 동시 등정의 첫 케이스를 기록했다.한편 슬로베니아의 안드레이와 마리아 스트렘펠리가 1990년 10월 7일 부부로 등정한 최초 기록을 세웠고, 1992년 9월25일에는 스페인 바스크대의 알베르토와 필릭스 이누라테기 형제가 동시 등정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로버트 샤워가 18년간 에베레스트 촬영 원정을 해온 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88년 9월 26일 프랑스의 쟝 마르끄 보아뱅이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나르는 첫 기록을 세웠는데, 그는 거의 8천 피트 허공을 날아 11분 뒤 웨스턴쿰 제 2캠프에 내렸다.1992년 9월에는 피에르 타르디 벨이 남봉에서 1만5백 피트를 스키로 세 시간 내려와 최고소 활강 기록을 세웠다.

 

에베레스트 희생자 기록

 

22개 국에서 148명의 희생자가 났으며 그 가운데 4명은 여성이다.

 

사망의 원인과 장소를 보면

 

1. 97명이 네팔쪽에서 그리고 그 가운데 19명은 쿰부 아이스폴에서 희생됐다.

 

2. 57명이 눈사태와 세락 붕괴로 사망했으며, 그 중 36명이 네팔쪽이다.

 

3. 신병과 체력 소모 등으로 34명이 사망하고 그 중 19 케이스는 네팔쪽에서 일어났다.희생자 가운데 31명은 정상에서 내려오다 죽었고 그 속에 여성이 세 들어 있다.

 

4. 이 밖에 원인 불명이 21건 있는데, 추락한 듯하며, 16건은 네팔쪽에서 일어났다.

 

5. 나라별 희생자 수는 네팔인 50명 가운데 셀파가 44명이며, 41건이 네팔쪽에서 발생하고 그 중 39명이 셀파다. 그리고 인도 셀파 9명(네팔쪽에서 2명 사망)과 셀파 아닌 14명으로 도합 23명. 일본인 13명, 영연방 9명, 중국과 티베트인 8명, 미국 6명, 폴란드 5명, 체코 5명.

 

희생이 컸던 조난들

 

1. 1922년 6월7일 인도 셀파 5명이 눈사태로

 

2. 1970년 4월15일, 일본 원정대의 셀파 6명이 쿰부 아이스폴 붕괴로

 

3. 1974년 9월9일, 프랑스인 1명과 셀파 5명이 롤라능선에서 눈사태로

 

4. 1989년 5월27일, 폴란드인 5명이 롤라능선에서 눈사태로

 

5. 1996년 5월10일, 뉴질랜드 2명, 미국 2명, 일본 여성 1명이 남동릉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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