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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에베레스트의 역사 (3)

by 안그럴것같은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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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후 4 반세기

 

아놀드 런이 그의 󰡐등산 백년사󰡑 에서 1946년부터 1956년에 이르는 기간을 󰡐위대한 10년󰡑 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은 세계 등산계가 이 사이에 눈부신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즉 남미의 피츠로이와 아콩가구아 남벽을 비롯한 어려운 등반을 위시해서 히말라야 8,.000m급 14봉 가운데 여덟이 등정됐다. 그런데 그 14봉이 완등되려면 8년이 필요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등산 선진국 젊은이들이 세계의 지붕 중앙 아시아 고산지대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특히 그 원동력이 된 것은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그리고 낭가파르밧 등정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등산가들의 관심과 집념은 최고봉으로 몰린 것은 물론이며, 그것은 1977년까지 25년 사이에 15개국 27개 원정대가 도전한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보면 9개 국에서 12개팀이 성공했으며 희생자도 24명이나 났다.

그런데 여기 일단 1977년으로 선을 그은 데는 이유가 있다. 즉, 우리 한국대가 갔던 1977년까지 에베레스트는 해마다 봄,가을에 각각 한 등반대밖에 입산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만 해도 에베레스트 등반의 어려움 때문에 네팔 정부는 몬순 전과 후가 일기가 비교적 안정하다고 보고 이렇게 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로 한군데 팀이 몰리면 불화가 우려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53년 초등으로 에베레스트 공격 전술은 대체로 알려져서 어느 원정대나 거의 같은 편성과 전술로 일관했다. 그러나 1970년까지 등반활동을 보면 봄보다 가을에 성과가 부진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색적인 원정이 한 건 있었는데, 그것은 1963년 미국대였다. 초등 이래 10년 동안 히말라야 등산은 가장 쉬운 길을 골라 오르고 그 길로 다시 내려왔지만 이 미국대는 서릉과 남동릉을 두 방향에서 오르고 서릉팀이 등정 후, 남동릉으로 내려오는 획기적인 에베레스트 횡단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서릉의 󰡐혼바인 꿀와르󰡑 는 그때 혼바인 대원의 이름에서 왔다.

대장은 1952년 스위스 원정대에 참가한 노만 다이렌훠드고 대원은 18명이었으며 그들의 전법은 서릉 팀(혼바인과 언솔드)과 남동릉 팀(비숍과 저스타드)이 정상에서 랑데부 하기로 했는데, 3시 30분에 남동릉 팀이 정상에 오르고 45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소는 바닥나고 기진해서 도리없이 하산길에 들어서자 날은 어둡고 남릉 최종 캠프는 멀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나며 서릉팀이 나타났다. 결국 네 사람은 밤 12시 반, 8,500m고소에서 그야말로 맨몸으로 하룻밤을 지샜는데, 만일 이때 바람이 있었으면 필경 모두 죽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트래버스가 실현했지만 그들중 셋은 심한 동상으로 남체에서 카트만두까지 헬기로 운반됐다. 그러자 2년 뒤 인도 원정대가 5월 하순 4번에 걸에 9명을 등정시켰는데, 이것은 1960년과 62년의 거듭된 실패 뒤의 성공이었다.

1970년은 일본이 48명의 편성으로 처음으로 남서벽에 붙어보려 했으나 기권하고 결국 노멀루트로 올라가는 것으로 그치고, 한편 프로 스키어가 사우스콜에서 활강하는 이벤트를 벌렸는데, 이때 일본팀을 지원하던 고소포터 6명이 아이스폴에서 세락이 무너져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1971년에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대가 의욕적으로 남서벽에 도전했는데, 13개국에서 당대 일류 클라이머들이 59명(일본에서 2명)이 모였지만 원래 개성이 강한 서구인들이어서 끝내 팀웍을 이루지 못하고 공중분해하고 말았다.

그 2년 뒤인 1973년 봄 이탈리아가 64명의 대원과 헬기 두 대를 동원하는 전무후무한 기동작전으로 에베레스트 도전에 나서 표고 6,500m 캠프 2지점까지 물자를 수송했는데, 그 과정에서 헬기 한 대가 추락했다. 그러나 이 원정에서 이탈리아대는 두 번에 걸쳐 대원 5명, 셀파 3명을 정상에 올렸다. 그 가운데 락파 텐징이라는 셀파는 1977년 한국 원정 때 사다로 활약했다.

같은 해 가을에 일본은 다시 남서벽을 노렸으나 역시 기권하고 전번과 마찬가지로 노멀루트로 올라갔다. 이때 원정대의 규모는 48명이었고 그들이 도달한 남서벽의 지점은 8,380m였다. 1974년은 에베레스트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는 불모의 해였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과 프랑스가 각각 봄과 가을에 남동릉과 서릉으로 등정을 시도했는데, 스페인대는 결국 표고 8,500m 지점에서 심한 동상을 입고 후퇴했으며 ,프랑스대는 서릉 롤라능선에서 눈사태로 대장과 셀파 5명이 희생 당하는 큰 타격을 받고 원정이 중단됐다. 이때 실패한 프랑스대는 한국으로는 잊을 수 없는 원정대였다. 이 1974년은 대한산악연맹이 에베레스트 입산허가를 받고 첫 훈련을 시작하려는 해였는데, 그 무렵 프랑스원정대로터 사정이 있으니 한국이 먼저 갈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서신이 왔다. 그러나 한국 역시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프랑스는 모처럼 어려운 입산허가를 얻어 놓았으니 하는 수 없이 원정길에 올랐던 것 같다.이러한 불모 1년 뒤 에베레스트는 등반사상 새로운 기록을 낳았다. 즉, 일본의 여성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했으며 같은 봄 시즌에 중국대가 북릉으로 티베트인 8명과 중국인 1명을 올렸는데, 이 속에 티베트 여성 한명이 있어서 두 번째 여성 등정자가 나왔다.

그러나 1975년을 더욱 값지게 한 것은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 대가 끝내 남서벽을 돌파한 일이다. 즉 9월24일 두갈 해스턴과 턱 스코트가 그리고 이틀 뒤 피트 보드맨과 마이크 버크가 셀파 퍼템바와 함께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이 남서벽 등반대는 짐을 줄이려고 천막없이 설동 전술을 썼는데, 남서벽에서 11시간 악전고투 끝에 15시 남봉 밑에 설동을 파고, 18시 등정한 뒤 하산 도중 21시에 다시 설동으로 밤을 지새는 초인적 힘을 발휘했다.이듬해인 1976년은 봄, 가을 모두 성과를 올린 해였으나 극히 평범한 원정으로 이렇다 할 기록이 없었다. 다만 봄 원정대는 영국과 네팔 육군합동대였고 가을 원정대는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등반대였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977년이 밝았는데, 봄철 뉴질랜드 원정대는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셀파없이 7명의 클라이머와 캐나다인 1명으로 알파인 스타일로 도전했다.그러나 사우스콜 직전에서 강풍으로 후퇴했다.

 

 

그 해 가을, 한국원정대는 역시 18명이라는 적지 않은 편성으로 아이스폴 공작용 사다리 100개와 미국 산소와 프랑스 산소로100통을 준비하고 람상고에서 베이스캠프까지 380km를 걸어가는 여유를 보였는데, 프랑스 산소 50개가 커넥터 문제로 쓰지 못하게 됐을 때 아이스폴에서 12개를 발견한 덕분에 2차 공격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대의 기록으로서는 포스트 몬순기에 가장 일찍 그리고 빨리 오른 점과 1차 공격조가 8,700m지점에서 홀몸으로 비박하고 무사히 귀환한 점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한편 한국으로서는 국력이나 자연조건 그리고 등산역사로 보아 극히 빈약했으나 세계 최고봉에 비교적 일찍 등정기록을 남긴 셈이다.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으로부터 25년, 즉 4반세기를 맞는 1978년은 에베레스트 등반사 뿐만 아니라 세계 등산의 역사에 획기적 전환기를 기록하는 해였다즉, 에베레스트 도전 초창기부터 줄곧 열띤 쟁점이 돼 오던 산소사용 문제가 완전히 판가름 난 것이다. 즉, 이 해 5월 오스트리아원정대가 노멀루트로 정상을 노릴 때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개인자격으로 행동하며 5월8일 끝내 무산소 등정을 이룩했다. 이 원정에서 본대는 세 번에 걸쳐 7명, 즉 대장을 비롯해서 대원5명과 셀파 등이 정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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