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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에베레스트의 역사 (2)

by 안그럴것같은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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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는 멀고 험했다

 

에베레스트에 등산가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 뒤의 일이다. 즉 1907년 영국산악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들이 명명한 최고봉 도전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영국은 러시아와 조약을 맺으려는 참이었고 한편 에베레스트를 국경으로 하고 있는 티베트와 네팔이 외국인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고 있어서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에베레스트 등반의 기운이 무르익기는 세계1차 대전이 끝난 뒤였다. 드디어 영국 등반대는 1921년 5월 장도에 오르는데, 영국이 역사적인 거보를 내딛게 된 것은 당시 국력이 멀리 해외로 뻗으며 인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군인들이 중앙 아시아를 탐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입수하고있었지만 멀리 구름위에 뜬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완전히 베일에 싸인 채였다.

에베레스트는 인도 다아질링에서 직선거리 150km인데 다아질링을 떠난 등반대는 길을 찾느라 돌고 돌아 500km를 갔다.대장은 하워드 대령이고 수명의 과학자와 등반대원 4명이 붙었는데, 이들은 킷심 고개를 넘어 티베트로 들어가 4000m 고소인 황량한 고원을 가서 그제서야 에베레스트 가까이 나갔으니 첫 원정대는 구성으로나 행차로 보아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탐색대에 불과했다.그런데 이때 히말라야 경험이 제일 많았던 케라스 박사가 병사하자 다음날 비로소 에베레스트가 멀리 바라보였다.

탐색대가 에베레스트 산록에 도달했을 때 대원 하나가 와병하여 결국 조지 말로리와 바로크가 빙하로 들어가 󰡐롱북빙하󰡑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길이는 30km나 되었다.그런데 빙하에서 바라보는 북면은 절벽이어서 그들은 서릉으로 올라가 안부에 섰다. 이때 반대쪽으로 험악하고 장대하기 이를데없는 아이스폴이 내려다 보였다. 그들이 오른 안부가 오늘날 롤라(Lho La)능선이며 훗날 에베레스트 통로가 된 아이스폴(Ice Fall)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조지 말로리였다.

이 탐색활동은 4개월이 걸렸는데, 과학자들의 측량 조사가 있는동안 말로리는 처음 동쪽을 살피다 북릉 안부로 나가게 됐다. 이른바 노스콜로 북쪽 통로의 관문이 됐는데, 그 뒤 1938년 제 7차 등반 활동을 끝으로 하는 티베트 쪽으로 오르는 등반대는 모두 이 노스콜을 경유했던 것이다.

영국의 2차 원정대는 1922년5월 처음으로 노스콜을 넘어 8,225m고소에 도달하여 산소없이 8,000m급 고소를 넘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 2차 공격에 휜치 대원이 셀파를 데리고 8,326m고소까지 진출했는데, 이것은 인공산소 덕분이었다. 휜치는 산소 옹호자였지만 산소 문제는 이때부터 크게 대립하였다. 당시 산소기구는 무겁고 고장이 많은 것도 반대론의 근거이기도 했다. 등반대는 3차 공격에 나섰으나 노스콜에서 눈사태에 휘말려 셀파 7명이 묻히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그러자 2년 뒤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길이 남는 제 3차 원정이 감행됐는데, 이때 말로리와 어빈이 실종하는 비극을 빚었다. 대장은 브루스 준장이었는데, 티베트 가는 길에 신병으로 노튼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노스콜밑에 캠프 3일 밀고 나갔으나 심한 눈보라와 추위로 전진을 못했는데, 이때 포터들이 동상과 폐렴에 걸리고 두 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노튼과 말로리등은 끝네 노스콜에 전진기지를 마련하고 1차 공격조로 말로리와 브루스(준장의 조카)가 셀파 9명을 데리고 7,710m고소에 제 5캠프를 세웠다.

그러나 셀파들이 겁을 먹고 주저앉았다. 이때 노튼과 소마벨 조가 올라와서 8,170m고소까지 짐을 올렸다. 그러나 그 뒤 소마벨의 체력이 떨어져 결국 노튼 혼자 전진을 계속하여 8,572m 고소까지 도달했다. 이 고도는 훗날 에레베스트가 초등될 때까지 인간이 도달한 최고 지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 2조가 물러서자 1차 공격조였던 말로리가 이번에는 어빈과 짝을 묶고 오델이 이 팀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들은 6월6일 셀파8명을 데리고 노스콜을 떠나 제 5캠프에 오르자 셀파4명을 하산시키고 다음날 제 6캠프에서는 남은 셀파도 내려보내고 이튿날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6월8일 두 사람은 산소기구를 지고 정상으로 향했다. 지원을 맡은 오델은 하루 뒤 노스콜을 떠나 제 5캠프에서 묶은 다음 공격조를 따라 혼자 제 6캠프로 올라갔는데,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며 멀리 설사면에 작은 물체가 나타났다.

그 검은 점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으로 다가서고 있었고 그 뒤로 또 하나의 물체가 보였는데, 시간적으로는 좀 늦은 듯한 12시50분이었다. 오델은 제 6캠프로 돌아와서 60m를 더 올라가 큰 소리로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뒤 두 시간 가량 눈보라가 일고나서 에베레스트 북면이 맑은 하늘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델은 불안한 마음으로 일단 노스콜로 내려갔다가 다음날 제5캠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혼자 제 6캠프로 올라가 보았으나 천막안은 그대로 였고 공격조가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영국에서는 말로리와 어빈의 장례식을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국왕이 배석한 가운데 국장을 로 치루었다. 그 뒤 말로리와 어빈의 실종은 하나의 전설로 승화하고 그들은 결국 정상을 밟았을까 하는 문제로 화제가 되었다.

영국이 제 4차 원정대를 파견하게 된 것은 1933년이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티베트가 입국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등산에 따르는 조건들이 좋아져 원정대는 8,350m고소에 무난히 제 6캠프를 건설하고 5월30일 전진을 계속했다. 이때 조금 오른 곳에서 어빈의 것으로 보이는 피켈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꿀르와르까지 올라가자 지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튿날 2차 공격조가 행동에 들어갔으나 일기불순에 눈은 깊고 대원 하나가 위통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스마이스 혼자 꿀르와르까지 전진하고 돌아섰다.

이듬해에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윌슨(37세)이라는 영국 퇴역군인이 혼자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했는데, 티베트의 입국허가가 내리지 않아 셀파 셋을 고용하고 밀입국 했다. 그는 노스콜 밑에 천막을 쳤는데, 셀파들이 영국 등반대가 남긴 식량 있는데를 알려주어 그것을 믿고 혼자 노스콜을 겨냥하다 결국 천막안에서 죽었다. 윌슨의 시체는 다음해 제 5차 원정대가 발견했다. 그런데 제5차 원정대는 입산허가가 늦어지고 원정준비도 미진해서 영국은 과거와 다른 원정계획을 세웠다. 즉 영국은 정찰대의 임무를 띄워 에베레스트 주변의 지리적 지식을 넓히고 정상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하고 대장 십튼과 난다데비를 탐험했던 유능한 등산가 틸만을 비롯해서 지형학자 스펜서를 주멤버로 하고 전도가 촉망되는 20세의 텐징 노르게이 등을 대동했다.

정찰대는 5월말 다아질링을 떠나 왕년의 루트를 피해 처음부터 새로운 길을 더듬어 나갔다. 그런데 그해 몬순이 늦게 6월 26일에 오면서 에베레스트 일대는 좋은 날씨가 이어졌지만 대장은 등정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사실상 그들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여 롱북빙하로부터 6일만에 캠프4를 세웠는데, 더 오르지 않고 빙하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탐사하면서 두달 사이에 주변 봉우리를 26개나 등정했다. 이때 그들은 에베레스트 서릉을 살피고 웨스턴 쿰이 내려다 보일 때까지 고도를 높혔다. 한편 스펜서 일행은 주변 지리를 스케치해서 20년대부터 해온 작업을 더욱 진척시켰다.

그러자 영국은 1936년 제 6차 원정대를 파견했다. 대장은 전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스마이스와 십튼 등 히말라야 경험이 많은 사람들 12명으로 강화하고 셀파도 23명이나 고용했다. 그런데 원정대는 운이 없었던지 몬순이 빨라서 에베레스트 일대에 많은 눈을 퍼부었다. 몬순은 5월22일 다아질링을 덮치고 4일동안 인도 전역을 강타했다. 결국 등반대는 셀파와 힘을 모아 간신히 노스콜에 캐프 4를 건설했다가 모두 베이스캠프로 후퇴했다. 그들은 6월3일 다시 노스콜 진출을 시도했으나 기상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아 끝내 롱북빙하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뒤 제 7차 원정대가 나섰는데 대장에는 빌 틸만, 대원으로 스마이스,십튼,오델,올리버,와렌 등 강력한 멤버들로 구성되고 셀파도 앙 타르키,파쌍,꾸쌍,텐징 등 유능한 팀이었다. 틸만 대장은 대규모 원정대 조직을 비난하고 장비도 절대 필수적인 것으로 줄이는 주의였으며, 따라서 예산도 감축됐다. 그런데 이 해도 몬순이 빨리왔다. 보통 6월10일 경이던 몬순이 5월5일에 벌써 눈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등반대는 4월6일 롱북빙하에 도착하여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그 무렵에는 에베레스트 주변 기상이 좋아서 전진 캠프를 셋을 건설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 뒤 기상이 악화하는 가운데 6월 초 전 대원이 노스콜에 올라가서 제 5캠프를 세우고 전진을 계속하여 끝내 8,290m 고소에 제 6캠프를 세우게 됐다. 그리하여 6월9일과 11일 두번에 걸쳐 정상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결국 깊은 눈과 추위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국은 1921년부터 17년에 걸쳐 7차의 등반대와 탐사대를 파견하고 많은 인명의 손실을 입으며 이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이르는데 필요한 소중한 체험과 자료를 축적했다.

그만큼 성공의 길이 밝고 다가선 셈이었다. 그러나 여기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 모든 꿈이 부서질줄 누가 알았으랴? 즉, 전쟁으로 나라마다 사정이 달라지며 1950년 중공이 티베트를 침입하고 티베트는 철의 장막을 내려버렸다. 그리하여 에베레스트에 이르는 유일한 관문으로 보였던 북방 루트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셈이다. 이에 앞서 1947년 봄 캐나다의 덴만이 셀파 텐징 노르게이와 당 다와를 데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티베트로 잠입해서 빠른 행동으로 빙하를 올라가 노스콜밑에 까지 나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눈보라를 만나 진출을 못하고 후퇴했다.그런데 1950년 티베트가 문을 닫자 이에 맞서 지금까지 쇄국 정책을 써온 남쪽 나라 네팔왕국이 문호를 개방했다. 이것은 바로 에베레스트를 남쪽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지난날 에베레스트를 북쪽에서 접근하던 식으로 모든 활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네팔쪽 지리와 그 밖의 사정이 완전 백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과거와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영국의 독점 무대였던 에베레스트 행차에 미국이 끼어들었다. 즉 1936년 난다데비와 그 2년 뒤 K2를 시등했던 미국의 찰스 하우스톤이 리더가 되어 틸만과 함께 남체바자르를 지나 쿰부계곡을 탐사하고 아이스폴 기슭까지 올라갔다. 이때 그들은 비로소 웨스턴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세락지대를 알았는데, 여기가 바로 1921년 영국의 제1차 정찰 때 말로리가 북쪽에서 롤라능선에 올라 내려다 본 그 아이스폴이었다. 1951년에 이르러 영국의 히말라야위원회가 추계 원정대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그 지휘권을 십튼에게 맡기고 있을 때 덴마크의 클라우스 베커 타르센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비밀리에 에베레스트 단독 시등을 감행했다. 이 주인공은 등산 경험이 없었는데, 그 해 4월 셀파 4명을 데리고 남체바자르에 이르러 쿰부계곡을 지나 롱북으로가는 통로로 롤라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셀파들을 데리고 롤라능선을 넘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남체로 돌아와 이번에는 초오유 서쪽으로 넘어가는 남파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이 통로는 일찍이 네팔과 티베트의 교역로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결국 그는 4월30일 티베트로 들어가서 몰래 롱북을 지나 지난날 영국대의 캠프3 자리까지올라갔다. 그는 5월9일 드디어 노스콜을 노렸으나 강풍에 밀려 결국 후퇴했다. 그리고 중국 관리의 눈을 피해 도망하며 남체바자르로 돌아왔다.

그러자 가을이 오며 영국도 정찰활동에 들어갔는데, 일행이 남체바자르에 도착할 무렵으 9월 하순이었다. 정찰대는 보딜론 일행이 아이스폴을 살피는 동안 십튼과 힐러리는 푸모리쪽으로 올라 멀리 앞을 내다보았다. 이 때 아이스폴을 넘어 웨스턴쿰을 따라가면 사우스콜로 이르고 거기소 에베레스트 남동릉으로 오르게 되는데, 우선 제일 난관은 고도차 600m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와 높이 솟은 빙탑의 카오스 지대였다.

그러나 여기밖에 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10월4일 정찰대는 이 거대한 빙하를 거슬러 올러 16시경 드디어 웨스턴 쿰을 바라보았다. 그 때 시간은 이미 늦었고 눈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그대로 철수했다. 그로부터 3주 뒤 십튼 일행은 다시 푸모리능서에 서서 웨스턴쿰과 사우스콜의 사정을 알아보고 한 번 해볼만 하다고 보고 10월24일 전 대원이 셀파 셋을 데리고 아이스폴을 돌파한 뒤 웨스턴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엄청나게 큰 크레바스가 두 군데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여기를 피해 돌아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십튼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제 드디어 사우스콜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정찰대가 돌아오자 영국은 용기와 희망에 들떠 본격적인 원정활동 계획에 착수했다. 그런데 1952년 네팔정부는 이 해 봄 가을 두 계절 모두 스위스에 원정을 허락하고 영국은 초오유로 가도록 했다. 이래서 영국의 독점 무대에 비로소 다른 원정대가 끼어들게 됐다. 대장 이하 8명의 등산가와 과학자 두 명으로 구성된 스위스대는 텐징을 중심으로 셀파 20명, 포터 165명을 데리고 3월19일 카라반을 시작, 13일 뒤 남체바자르 도착, 4월25일 쿰부빙하에 베이스캠프 설치, 다음날 아이스폴 기슭에 제 1캠프(5,250m)를 건설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만 해도 셀파들이 아이스폴을 당일에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스폴 한 가운데 제 2캠프를 만들고, 크레바스에는 자일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가는 고생 끝에 드디어 웨스턴쿰 초입 5,900m에 제 5캠프를 마련했다. 웨스턴쿰 지대는 길이 5km 가량 되는 빙하 분지로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 등 7~8천미터의 산릉 사이에 갇힌 대설원으로 그야말로 태고의 정적을 간직하고 있어 스위스대는 이곳을 󰡐침묵의 계곡󰡑 이라 불렀다. 그들은 여기를 거슬러 올라 표고 6,450m 지점에 캠프4를 세운 다음, 5월12일 웨스턴쿰과 로체사면이 부딪히는 곳에 이르러 제 5캠프를 마련했다.이제 목표 에베레스트로 오르는 길목에 선 느낌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 앞을 가로막은 로체 사면은 너무 가파르고 험해서 기분처럼 전진할 수가 없었다. 게다기 도중에 돌출한 암부가 나왔는데 여기를 그들은 󰡐제네바 스퍼󰡑 라고 명명했으며, 등반대는 이 급사면 등반에 기진맥진 해서 도중에 불시 야영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5월26일 낮, 등반대는 드디어 사우스콜에 도달하여 다음날 대원 셋과 텐징이 비로소 에베레스트 남릉으로 발을 내디뎠다.처음에 그들은 루트정찰을 목적으로 천막 한 동을 고소까지 운반하고 돌아올 생각이어서 그 밖에 준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고소에 좋은 막영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랑베르 대원과 텐징이 머물렀다가 다음날 정상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같이 왔던 다른 두 대원은 하산하고 둘만 남았는데, 그들에게는 이 고소에 침구도 스토브도 없었다. 그야말로 알프스에서 단련된 랑베르와 강인한 텐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운 밤을 그들은 지샜다.

이튿날인 5월28일, 두 사람은 지구의 최고 지점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소기구는 가지고 있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차차 기상이 악화하고 눈보라가 일었다.그들은 간밤의 막영지에서 고작 200m오르는 데 다섯 시간을 소모한 뒤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때 그들이 오른 고도는 8,595m로 정상 250m 앞까지 육박했던 것이다.이어서 5월30일, 등반대는 두 번째 공격을 시도하려고 사우스콜로 올라왔으나 연 3일을 계속하는 악천후로 끝내 더 이상 등반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해 가을을 맞아 스위스대는 한층 더 밝은 희망을 가지고 행동에 들어갔다. 대원은 여전히 대장 외 8명이었으나 봄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대장 슈발레와 랑베르 뿐이고 나머지는 알프스 가이드들이었다.

그들이 로체사면에 캠프 5를 건설했을 때는 계절도 늦은 10월 하순이었다.그런데 사우스콜로 향할 때 낙빙에 셀파가 중상을 입고 끝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등반대는 전진을 계속, 캠프 6을 7,100m, 캠프 6을 7,400m 고소에 각각 건설했다. 스위스대는 다음에 영국을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등반에 불리한 가을철을 마다하고 원정을 감행했던 것인데, 겨울은 다가오고 강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그래도 그들은 11월19일 사우스콜에 도달, 캠프 8을 세운 다음 20일 세 대원이 남릉으로 향했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영하 40도의 추위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스위스대는 8,100m 고소까지 진출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제 드디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운명의 해가 왔다. 1953년이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 산악계는 신,구 등산가들의 물갈이 중이었다. 등산 경험이 풍부했던 사람들도 나이가 많아 후진으로 물러나고 있었는데, 다행히 전년의 초오유 원정이 새로운 등산가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런데 1953년은 영국 여왕의 대관식이 있는 해여서 히말라야 위원회로서는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이 국가적 행사를 더욱 빛내려는 의욕에 불탔다. 따라서 원정대 대장으로서는 더욱 강력한 리더쉽이 요청되어 영국산악회 회원이며 프랑스 산악부대에 관계하고 있는 존 헌트가 임명되고 그 밑에 등산 경험과 기술면에 가장 강한 자들이 들어갔다.그런데 결과를 놓고보면 헌트 대장이 그의 등반기 첫머리에 밝힌 대로 그들의 성공은 전년 스위스대의 공이 아주 컸다. 물론 영국대로서는 특히 산소보급기 개량을 중요시 하고 이에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등반대는 카라반 도중 표고 3,800m 지대인 당보체에 도착하자 3주 동안 머물며 부근 고지를 오르내리며 고도순화에 노력하는 한편 산소기구를 시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등반대의 전진캠프는 착착 건설됐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전년도 스위스대의 위치와 큰 차가 없었다. 즉, 4월 22일 웨스턴쿰 초입인 표고 6,150m에 캠프 3을, 이어서 6,460m, 6,700m 그리고 7,000m 고소에 각각 캠프를 전진시켜 나갔다. 이러는 동안 힐러리와 텐징 조가 처음부터 아주 순조로운 전진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바로 두 사람의 인간적 조화와 힘과 기술이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는 증거였다.5월7일, 헌트 대장은 대원들을 모아놓고 정상 공격 최종안을 설명했다. 1차는 보딜론과 에반즈 조가 폐쇠식 산소기구를 가지고 남봉까지 갔다가 가능하면 등정을 시도하기로 하고 헌트와 그레고리가 셀파 다섯을 데리고 8,500m 고소에 캠프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힐러리와 텐징이 그곳까지 이번에는 개방식 기구를 가지고 올라가서 하룻밤을 묶고 정상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5월26일 1차 공격조는 사우스콜을 뒤로 전년 스위스대가 도달했던 지점을 넘고 여섯 시간 걸려 에베레스트 남봉(8,754m).에 도달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후퇴하고 지원차 나섰던 헌트 대장은 8,300m 고소까지 올라갔다. 사우스콜에는 2차 공격조인 힐러리와 텐징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강풍 때문에 떠나기를 꺼렸다. 전날 지원에 나섰던 에반즈와 보딜론 등의 컨디션이 아주 나빠 제 힘으로 하산이 힘들어 헌트 자신 그들을 따라 나섰다. 28일 최종 공격이 시작됐을 때 로우와 그레고리 그리고 앙 니마가 지원대로 한발 먼저 나섰고 힐러리와 텐징은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올라갔다.

두 조는 지난날 스위스대가 막영했던 곳 가까이서 합류했는데, 여기에 전날 헌트 대장이 셀파와 함께 짐을 올려다 놓은 곳이었다. 그들은 이 짐들을 각자 23kg씩 지고서 표고 8,500m 지점까지 올라갔다. 14시 30분이었다. 여기서 지원조는 하산하고 공격조는 경사면에 천막을 치고 밤을 지샐 준비를 했는데, 막영지로 적합하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이곳이 제 9캠프가 된 셈이다.그들은 저녁을 먹고 탈수를 막으려고 물을 많이 마셨다. 힐러리는 천막안에서 산소통 밸브를 열었다. 새벽 3시에 산소가 바닥났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다시 물을 마시고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6시 반, 떠날 채비로 장갑, 우모 아노락, 윈드자켓, 등산화, 산소기구 등을 몸에 걸치니 마치 외계인 같았다.

정상으로 이어진 산릉을 갈 때 처음에 그들은 애를 먹었다. 설면은 크러스트 되있었으나 몸의 무게로 설면이 꺼지면서 무릎까지 빠졌다. 전진하다 보니 지난날 헌트와 보딜론이 버린 산소통이 있었는데, 다행히 산소가 조금 남아있어서 돌아올 때 쓸 수가 있었다. 그러자 9시에 두 사람은 남봉에 도달했다. 그때 전방에 정상 능선이 보였고, 능선따라 동쪽으로 거대한 눈처마가 발달하고 있었다. 그러니 반대쪽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하게 보였으며, 다행히 눈은 단단했다.

산릉 한 곳에 바위 기둥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그 기슭에 섰다. 훗날 󰡐힐러리 스텝󰡑 이라 불리게 된 유명항 곳인데, 먼저 힐러리가 여기를 침니 오르는 기술로 바위와 눈처마 사이를 헤치며 오르고 텐징이 뒤따랐다. 그러자 산릉의 경사가 누우며 차차 걷기 편해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전진했다. 얼음으로 된 둥근 언덕이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그리고 드디어 눈에 덮인 정상 돔에 올라섰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공허했다. 5월29일 11시 30분이었다. 이제 1921년에 시작한 에베레스트 탐색 등정 활동이 32년의 세월을 보내며 총 10회를 거듭한 뒤 드디어 초등의 영예를 얻었다. 세계 최고봉은 이렇게 해서 등정됐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특히 기록에 남을 일들이 있다. 즉 1952년 스위스 원정대의 공이다. 특히 랑베르와 텐징이 처음으로 제네바 스퍼를 넘어 사우스콜에 도달하고 남동릉을 따라 표고 8,595m까지 진출했다는 것과 또한 스위스 추계등반대가 개척한 로체사면으로 사우스콜로 이르는 루트가 오늘날 클래식 루트로 되어 남았다는 사실이다. 요는 1952년 스위스 원정대의 이러한 노고 위에 1953년 영국원정대의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대 자체로서도 정상 등정 이전에 보딜론과 에반즈 조의 남봉(8,760m) 초등은 기록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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