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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에베레스트의 역사 (4)

by 안그럴것같은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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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러쉬에서 상업등반까지

 

1978년이라는 전환기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으로만 의미가 있지 않다.이 해 포스트 몬순기부터 에베레스트 입산규정이 풀리면서 같은 계절, 같은 루트에 입산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의 제약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뜻에서 1978년은 에베레스트 역사에 가장 큰 분수령이 됐다.

즉 그 해 가을에 노멀루트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 원정대가 투입되어 10월 14,15,17일에 걸쳐 독일대가 11명, 프랑스대가 4명이 등정했다. 그러자 197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원정대가 (주로 슬로베니아 클라이머들인데) 서릉으로 도전, 5월13일과 15일 양일에 다섯명이 정상에 섰으며, 가을에는 독일대가 노멀루트로 10월 1,2 양일에 13명이 정상에 섰다. 그런데 1978년 이후 원정대의 특색의 하나는 국제대의 성격을 띠가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1978년 가을철의 독일대에는 폴란드와 스위스 등산가들이 참가했고, 프랑스대에고 오스트리아 산악인이 끼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독일대도 독일인 외에 미국과 뉴질랜드 클라이머들이 참가했다. 그러자 80년대에 들어서며 에베레스트 원정러쉬가 갑자기 심해졌다. 그 원인은 등산정보와 교통 및 생활수단이 풍부하고 다양화 한데 있겠지만 에베레스트 입산이 더욱 쉬워진 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1980년에 5개 팀이 붙어 그 가운데 4개 팀이 성공했지만 이 해의 수확은 라인홀트 메스너가 북면의 새 루트로 단독 등정한 일이다. 즉, 처음있는 완전 단독 무산소 등정이다. 이어서 81년에도 다섯 팀이 입산했는데, 남동릉에 도전한 미국을 빼놓고 서릉과 북동릉 그리고 동벽에 붙었던 네 팀은 모두 고배를 마셨다

한편 1982년에는 봄,가을,겨울 골고루 분산하여 모두 여덟 팀이 투입됐으나 역시 남동릉 두 팀이 성공하고 서릉 동북동 북벽 등을 노리던 다섯 팀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두드러진 성과로 봄철 남서벽에 새 루트를 뚫고 소련등반대 11명이 등정에 성공한 일이다.그때 등반대는 셀파들은 등정하지 않기로 사전 협약을 했었다.이어서 1983년에는 12개팀이 몰려 노멀루트를 택한 서독,미국합동대의 8명, 일본대의 5명(무산소)이 등정했을 뿐, 북벽과 북동릉 및 서릉을 택한 여섯 팀은 모두 참패했다. 그런데 같은 해 미국등반대가 에베레스트 역사에서 처음으로 동벽을 개척, 6명이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4년에는 전년과 같이 12개 팀이 입산했으나 성과는 부진하고 오직 불가리아 원정대가 서릉으로 다섯 대원이 등정하고 남동릉으로 하산하는 성과를 올렸고, 이듬해인 1985년에서 13개 팀이 도전, 이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대가 서릉과 남서벽 그리고 남동릉 등 3파전을 벌렸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그 많은 등반대 가운데 노멀루트로 오른 일본이 7명, 노르웨이, 미국, 영국 합동대에서 대원 9명과 셀파 8명이 등정했고, 북동릉으로 스페인, 네팔 합동대의 6명이 등정하는 데 그쳤다.

10여년 전만해도 그톡록 멀고 험했던 에베레스트에 루트도 계절도 없이 한 해 10개 등반대가 넘게 도전하는 것이 예사로 된 80년대 중반이었다.1986년은 한 마디로 이상한 해였다. 즉, 총 15개팀이 거의 실패하고 오지 스위스, 프랑스 합동대가 북벽으로 올라 그 해의 면목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변은 이듬해인 1987년에도 이어졌다. 즉 전년보다 많은 총 17개 팀이 모여, 이번에는 한국이 동계 (12/22)에 남동릉으로 대원(허영호)과 셀파 두 명을 정상에 올리는데 그쳤다.

 

 

1988년은 한국으로서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 때였는데, 거의 4반세기전 스위스가 전례를 남기기는 했으나 대산련에서 로체와 에베레스트를 동시에 등정하는 색다른 원정에 나섰고 대원 6명이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이 해는 총 21개 팀이 모여 그 중 10개 팀이 노멀루트로 몰려 7개 팀이 성공했고, 북쪽으로는 일본,중국,네팔 합동대에서 9명이 등정했다.

에베레스트는 드디어 한 해에 등반대가 20이 넘는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여기 색다른 계획이 연출됐다. 즉, 일본 등 3국 합동대가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횡단했다. 5월5일에 일본의 야마다 노보루(초모랑마 등정 세 번)와 셀파 그리고 티베트인이 북동릉을 거쳐 등정하고 한 시간 뒤 다른 대원 셋이 남동릉으로 올랐는데, 13시경 일본 TV팀 셋이 북동릉으로 오르고 그 뒤로 세 대원이 따라 붙었다. 그러자 얼마 뒤 먼저 오른 두 조가 서로 반대 쪽으로 하산했다. 이 등반에서 순다레 셀파는 사우스콜 경유, 다섯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같은 해 또 하나의 이색적인 기록으로 프랑스의 마르트 바타드가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혼자 22시간 반 만에 무산소 등정하여 무서운 주력을 보였다.

또한 1988년은 8년 뒤에 이른바 코머셜 엑스피디션으로 역사상 첫 대참사를 야기해서 세계등산계를 놀라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인 뉴질랜드의 롭 헐이 등장했다. 1988년은 에베레스트 초등 이래 제일 많은 27개 대가 활동했지만 남동릉을 노린 4개대를 빼고 모두 실패했다. 이 해에도 한국에서 세 팀이 입산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드디어 90년대를 맞고 한 해 30개 등반대가 입산하는 시대에 접어든다. 그리하여 그 첫 해인 1990년에는 우선 23개 대가 모였지만 그 중 반에 가까운 10대가 노멀루트로 몰려 9팀이 성공했으며, 등정 인원도 팀마다 셀파를 합쳐 5명에서 8명까지 오르는 것이 예사로 됐다.

그리고 역시 서릉과 북쪽 루트에서는 모두 실패하고 오직 미국,중국,소련 합동대가 북동릉으로 대원 20명을 올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990년의 특징으로 세계 최고봉에 상업등반대가 서로 의논이나 한 듯이 몰려왔다 .즉, 지난 88년 뉴질랜드를 이끌었던 롭 헐이 이번에는 국제대를 편성했고, 미국 상업원정대가 가을에 와서 7명이 등정, 프랑스대도 8명을 올 렸다.

이러한 일련의 상업원정대의 희생없는 큰 성과가 훗날의 대참사로 이어진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1991년이 밝으면서 에베레스트에는 한국대 셋을 포함하여 33개 팀이 운집하고 그 가운데 19개 등반대가 남동릉으로 몰렸으니 이 무렵 베이스탬프 지대인 쿰부빙하 일대에 느닷없이 천막촌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멀루트에서도 봄에 미국과 네팔 팀이 각각 한 두명, 미국,캐나다,오스트리아 합동대에서 4명이 등정하고, 가을에 소련과 미국 합동대에서 넷이 오른 외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으며, 북쪽으로는 역시 미국,뉴질랜드,오스트리아 합동대에서 10명이 오르는 것이 돋보인 성과였다.

1992년도에도 전년도와 같은 33개 등반대가 나타났는데, 남동릉으로 19(봄 12, 가을 7), 나머지가 북방 루트를 택했다. 그런데 남동릉 15개 대가 등정하고 북쪽에서는 14개 대 가운데 하나가 성공했을 뿐이다.드디어 에베레스트 초등 40주년을 낮는 1993년이 밝았다. 이 해 한국에서는 5개 팀이 도전하는 가운데 여성대가 끼어 1975년 일본 여성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 해 입산한 총 수는 31인데 그 가운데 남동릉을 택한 팀이 18로 여전히 많았으나 예년과 달리 한 대가 실패했을 뿐 모두 성공했다.

한국 여성대의 세 대원이 셀파 넷고 등정하던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는 39명이 올라 마침내 장터를 이룬 듯했다. 한편 인도,네팔 합동 여성대에서는 두 번에 걸쳐 대원 10명과 셀파 8명이 등정했다.

남쪽에서 이렇게 성과를 올리고 있을 때 북쪽에서는 중국,일본 합동대가 대원 6명을 등정시켰을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대의 허영호 대원이 북릉으로 올랐다가 일기악화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 특기할 기록이 있다면 일본대가 남서벽으로 6명이 올라 동계 초등을 성취한 일일 것이다.1994년과 95년에는 입산 수가 다시 26과 23으로 줄었는데, 94년 봄 8개 팀 가운데 남쪽 4개 팀에서 평균 10명을 등정시켰고, 북쪽 9개 팀은 거의 실패했다. 그런데 95년은 이상한 해였다. 총 23개 대가 입산한 가운데 남동릉 쪽은 셋 뿐이고 한국의 남서벽을 제외하고 모두 북릉으로 몰렸으며, 그 가운데 다섯을 빼고 나머지 13개 팀이 모두 등정에 성공했다.

이렇게 대거 성공한 것은 등반 계절(봄)이 비교적 안정되었던 것과 성공팀이 대부분 합동대였던데 있지 않았나 싶다. 이 1995년은 한국으로서 비로소 에베레스트의 노멀루트를 지양하고 4개 팀이 북릉, 북동릉 그리고 남서벽 등으로 방향을 돌린 점과 특히 남서벽을 완등한 것이 돋보였다. 또한 1995년에 상업원정대로 4개 국제대가 모인 점도 세계 등산계가 직면하기 시작한 새로운 문제로 생각됐는데, 그것이 드디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해가 바로 이듬해인 1996년이었다.

1996년은 에베레스트에 관한 한 특기할 만한 해였다. 즉, 전례없는 39개 등반대가 쇄도한 가운데 합동대가 가장 많았고(18개), 전체적으로는 등정(18팀)과 실패가 비슷했다. 그러나 북쪽이 남쪽보다 많은 21개 팀인 점을 볼 때 에베레스트 등반도 남과 북의 편차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1996년은 특히 5월10일에 남동릉에서 상업등반대가 겪은 고난의 희생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즉, 뉴질랜드의 롭 헐이 리드한 국제대가 대장 이하 7명이 등정하고 하산 길에 대장을 포함해서 4명이 죽었고(대원 둘, 셀파 둘), 같은 날 스코트 휘셔가 이끄는 국제대 역시 대장 이하 11명이 등정하고 하산하다 대장과 대원이 희생하는 등 10일에서 11일에 걸쳐 모두 8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 때 미국의 󰡐아웃사이드󰡑 주간지가 특파한 존 크라카우어가 뉴질랜드를 따라 등정하고 그때 벌어진 사태를 현지 르포(Jon Krakauer ; Into Thin Air)로 발표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상업등반의 문제는 이듬해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국제산악인회󰡑 에서 첫 의제로 토의됐다.

이 상업등반은 단순한 등산의 문제가 아니고 고도산업사회가 가져온 필연적 산물인 데 큰 문제가 있다. 크라카우어 기록에 의하면 롭 헐을 따라간 사람들의 경우 참가금이 6만5천 달러였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결코 등반능력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나 문제는 또 다른 데 있다. 당시 등반대에는 등산에 미숙한 사람과 유경험자들이 같이 들어 있었고,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다섯 번이나 오른 베데랑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날 남동릉에서는 리더 다섯 가운데 셋이 죽었다. 이에 대해 당시 사고 직전 남봉에서 돌아서서 살아난 한 참가자는 이들의 죽음이 손님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돈벌이 때문에 막대한 참가금을 받은 리더로서는 손님들을 최고봉에 올리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장사 밑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지 근 1년 뒤인 1997년 프레 몬순의 어느날 가이드를 따라 나섰던 다섯 사람 전원이 사망한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상업등반은 이런 일로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챨스 허스톤의 말대로 󰡐클라이밍은 이제 스포츠가 아니라 비즈니스가 됐으며 혹자에게는 수입만이 관심사다󰡑 고 말하여 󰡐위험이 따를수록 수입이 는다󰡑 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1996년의 놀라운 기록은 티롤 등산가 한스 카머란더의 에베레스트 등정이다. 그는 5월24일 노스콜을 경유 17시간만에 등저하고 스키고 하산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25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원정대가 대원 셋이 셀파 셋과 함께 등정했다. 그 밖에 소련 원정대가 북릉과 북동릉 사이의 눈과 바위에 덮인 꿀와르 지대를 따라 오르는 여려운 루트를 개척했지만 에베레스트에서 이런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되는 시대는 지나간 듯 하다.

세계 최고봉이 상업등반의 목표로 된 1996년은 그러니 만큼 에베레스트 등반사가 또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셈이다.이 해 봄에 29개 팀에서 398명이 입산하여 87명이 정상을 밟았는데, 이로써 초등 이래 에베레스트 등정자는 8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희생자도 143명에 달했다. 한 해 봄과 가을에 각각 한 등반대가 활동하고 한 두 명이 등정하면 큰 성공으로 여기던 시절부터 불과 4반세기가 지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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