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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등정으로 열린 근대등산

by 안그럴것같은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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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해온 인류의 산물이다
글 이용대

 

 

등산의 역사란 도전과 극복의 역사다.
인류가 험난한 자연에 도전해 나가면서 한계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간 변천과정이다.
200여 년에 걸친 등산 역사는 1786년 이래 인간이 자연에 도전해 나간 정신과 행동양식의 산물이다. 등산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처음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오르지 못했던 높은 산 정상에 오르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차츰 미답봉이 없어지자 그 양식이 인간의 한계극복의 역사로 변천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미답봉이나 미지의 세계는 거의 없다.
이로써 초창기의 고답적인 의미의 등산은 퇴조했지만 높이를 추구하고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해나가려는 인간의 욕구와 등산의 영역은 더 넓혀지고 있어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는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순수한 목적의 등산행위가 생겨난 것은 1760년 이후의 일이다.
스위스의 자연과학자인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Mont Blanc·4,807m) 등정을 제의하고, 26년이 지난 1786년 몽블랑을 등정한 것이 근대 등산의 시초가 된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 순수한 의도로 오른 최초의 모험이었으며 이때의 주역은 두 프랑스 사람이었다.
몽블랑 등정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등산은 어떻게 변천해 온 것일까?
등산 초기에는 오로지 알프스의 수많은 미답봉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피크 헌팅(peak hunting)이 성행했다.
즉 ‘최고점을 사냥한다’는 의미의 등정주의는 알프스 4,000m 높이의 봉우리들을 모두 오른 계기가 되었으며 알프스의 모든 봉우리들이 등정된 이후에는 발전된 등산을 위한 새로운 좌표가 필요했다.
즉,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새로운 대상이 없어지자 등산가들은 정상에 목표를 두지 않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눈을 돌리기 시작 한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의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rick Mummery)라는 등산가가 등정보다는 등로(登路)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등로주의를 제창하고 나서서 이제까지의 등산양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한다.
머메리즘(Mummerism)으로 부르는 등로주의는 등산의 목적이 단순히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데 더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정상에 올랐다고 하는 결과보다는 어떤 길(Route)로 어떻게 올랐는가에 역점을 두는 것으로 좀더 어렵고 다양한 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등산정신을 말하며 이것을 신등정주의(新登頂主義)라고도 한다.
신등정주의가 생겨난 이후 알프스에는 ‘벽등반’시대를 맞이한다. 수많은 고봉의 암벽과 암릉에는 새롭고 어려운 길이 생겼으며 길이 없는 곳을 뚫고 나가려는 새로운 등산양식은 설득력을 가지고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현대의 히말라야 등반도 머메리즘에 뿌리를 두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중엽,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발견되고 히말라야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의 등산계는 4,000m 무대에서 8,000m 무대로 행동영역을 넓혀간다. 등산 초기의 산물인 등정주의는 히말라야 등반 초기에 100년 전 알프스에서 성행했던 등정주의를 재현한다.

 

 

 



등산을 목적으로 몽테끼유를 초등한 드보프레

1950년부터 1964년까지 8,000m 높이의 고봉이 모두 완등 된 후 70년대 중반부터는 히말라야 거봉에서 벽을 겨냥한 빅월(big wall)등반이 생겨났다.
또한 등산장비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늘날의 8,000m 고소에서는 보다 어려운 새로운 길뿐만 아니라 단독 등반과 무산소 등반을 시작으로 소수인원과 적은 물량으로 등정을 성취하는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이 나타났다.
게다가 8,000m 고봉 세 개를 연속해서 등반하는 해트트릭(hat trick)까지 나타나 새로운 방식의 등반을 추구해 나아가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로써 미답봉이 없는 현재의 등산은 구체적으로 어떤 산을 어떤 방법으로 오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역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과 산의 관계는 먼 옛날부터 긴밀하게 이어져 왔다. 신앙을 목적으로 산 속에서 수행을 하기도 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침략을 막기 위해 산에서 군사작전을 펴기도 했으며, 의식주 해결의 방편으로 산에 올라 수렵을 하거나 식용식물이나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서도 산에 올랐지만 그것은 등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에 오르는 행위 자체를 순수한 목적으로 하는 등산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서양의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등산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산에 오른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카불(Kabul)을 공략하기 위해 힌두쿠시(Hind kush) 산맥을 넘었으며, 기원전 218년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 장군이 로마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의 크라이센 생 베르나르(Kleinen st. Bernard)를 넘은 기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산에 오른 기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산은 괴물이나 신이 사는 두려운 존재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이 산에 오른 기록은 1492년 프랑스 도피네 알프스의 암봉 몽테끼유(Mont Aiguille·2,125m) 등정이다. 프랑스 샤를르 8세의 시종인 드 보프레(de Beaupre)가 왕의 명령을 받고 등반한 것으로 몽테끼유의 등반은 순수한 목적으로 산의 정상에 선 최초의 등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등산에서는 사다리를 사용해서 오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인공보조 용구를 처음 사용한 등반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가 암벽을 어떤 방법으로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은 없다. 이 해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지리학적 탐험시대를 연 해이기도 하다.
1521년에는 스페인의 코르테스(Cortes)가 휘하의 병사에게 명하여 멕시코의 화산 포포카테페르(Popocateper·5,450m)를 등정했다.
이 등정은 산 정상에서 화약제조용으로 쓸 수 있는 유황을 채취해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1574년에는 최초의 등산기술서가 출판된다. 이 책은 취리히 대학의 요지아스 짐러(Josias Simler) 교수가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여행자들을 위해서 설상 보행기술, 로프, 크램폰(아이젠), 선글라스 등의 사용법과 크레바스와 눈사태의 위험 등을 언급한 책이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들은 등산이 스포츠로서 자리잡기 이전에 이루어진 등산이었으며 스포츠로서의 등산이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07m)등정이 시초가 된다.
물론 이 첫 등정에 상금이 걸린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본격적인 등산의 효시다. 불어 몽블랑의 몽(Mont)은 ‘산(mountain)’이며 블랑(Blanc)은 ‘흰빛(white)’으로 언제나 하얀 만년설이 덮인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어원은 유럽의 알프스에서 온 말이다. 현재 일반화된 알피니즘의 어원은 프랑스 말의 Alpinisme에서 시작된 후 주변의 여러 국가로 퍼지면서 이탈리아는 Alpinismo, 독일은 Alpinismus, 영국은 Alpinism으로 뒤따라 부르게 되었으며 등산이 알프스 지역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알피니즘이란 명칭은 일반화된다.
이 점에 대해 프랑스의 등산가 뽈베쎄에로는 만일 등산의 시원지가 알프스가 아닌 히말라야에서 시작되었다면 히말라야이즘, 안데스에서 시작되었다면 안데시즘으로 불렀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셀 빠가르의 몽블랑 초등으로 근대등산의 막 열어

등산이 스포츠로 자리잡은 때는 18세기 후반부터다.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이 초등된 것은 1786년이며, 그것은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몽블랑 등정자에게 현상금을 내건 것이 동기가 되어 26년만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1760년 어느 날 소쉬르가 프레방(2,526m) 산에 올라 맞은편에 있는 몽블랑을 보고 그 장엄함에 감동한 나머지 몽블랑 등정을 결심하고 ‘누구든지 이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는 이제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한 신비스런 이 산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그 당시 알프스 가까이 사는 산 마을 주민들은 산꼭대기에 악마가 살고 있어 얼음덩이와 눈사태를 일으켜 사람들을 해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소쉬르의 제안 이후 26년 동안 아무도 이 산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취리히의 시립병원 의사이자 저명한 과학자로 알려진 요한 야콥쇼히저란 사람조차도 알프스의 산 속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산을 두려워했다.
그는 현대 고생물학의 기초를 닦은 저명한 과학자였음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쉬르는 과학적인 분석으로 이 산의 신비를 밝히고 싶어 현상금을 걸었지만 아무도 정상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1783년과 1785년에 두 차례의 도전을 감행한 사람이 있었지만 기상 탓으로 모두 실패했다.
이 두 번의 도전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후일 몽블랑의 첫 등정자가 된 샤모니의 의사 미셸 빠가르(Michel Gabriel Paccard)가 끼어 있었으며,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 초등정에 성공한다.
몽블랑 첫 등정의 쾌거는 1786년 8월 8일에 이루어졌다. 미셀 빠가르와 포터로 고용됐던 수정 채취꾼인 자크 발마(Jacque Balmat)가 후일담이 복잡한 사연을 안고 마침내 정상등정에 성공한다.
이때가 프랑스혁명 3년 전의 일이었으며 이로써 마침내 근대등산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몽블랑 등정은 등산업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 두 사람의 거사는 알프스 등산의 여명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첫 발걸음이었으며 근대등산의 기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이 공포와 신앙만의 대상이었던 시대는 이로써 막을 내린다.
이 두 사람은 2,392m 높이에서 비박을 한 후 고산병과 설맹, 동상 등의 증세에 시달리면서 등반을 했다. 로프나 크램폰 같은 등산장비도 없이 크레바스를 건너고 깊은 눈을 헤치면서 비박지를 출발한 지 15시간만에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당시 이들이 사용한 용구는 알펜스톡(등산용 지팡이)과 간단한 방한복, 기압계, 온도계 등의 기구와 약간의 식량이 전부였다.
이 두 사람의 도전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또한 그들의 행동을 스포츠라고 여긴 사람도 없었거니와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이들이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극복한 등산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등정을 근대등산의 효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몽블랑 초등정 후에 발마는 혼자서 영웅이 되려는 의도로 빠가르는 정상에 서지 못했고 자기 혼자서 올랐다고 주장, 악의에 찬 허위선전을 하여 파문을 일으킨다. 이 세기적인 사건은 오랜 기간 동안 정사로 인정받지 못한 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진상이 세상에 밝혀진다.
당시 이 두 사람의 등정 모습을 산록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본 독일의 과학자 폰겔스 도로프는 그들이 오른 루트와 시간, 등정모습을 스케치하여 자세한 기록으로 남긴다. 훗날 이 자료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의 소중한 고증자료가 된다.
또한 프레슈필드의 집요한 추적으로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프레슈필드는 소쉬르의 증손이 보관한 일기를 찾아내서 빠가르의 등정 사실을 확인한다.
프레슈필드는 1895년에 알파인 클럽 회장을 지낸 영국의 탐험가로 <소쉬르의 전기(The life of Horace Benedict de Saussure, 1920년)>를 펴낼 정도로 소쉬르에 관해 깊이 연구해온 사람이다.
혹자는 이 두 사람의 몽블랑 등정을 놓고 소쉬르가 내건 현상금을 목적으로 올랐기 때문에 동기 자체가 순수한 등산이라고 볼 수 없어 근대등산의 시초로 볼 수 없다는 이견을 내세우기도 한다.

 

 

 



근대등산의 아버지 소쉬르

몽블랑의 두 번째 등정은 소쉬르에 의해 1787년 8월에 이루어진다.
그는 스포츠 등산의 첫 계기를 마련했고 스스로가 재등을 성공시킨 인물로 근대 등산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등산의 여명기에 이들이 사용한 장비란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소쉬르는 무게가 68kg이나 나가는 이불과 장작,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할 몇 개의 사다리를 준비해서 20명의 짐꾼에게 지게 했다.
이 등산에서 소쉬르는 과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정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가지고 간 여러 계기를 사용해서 몽블랑의 높이를 4,755m로 측정한다. 미셸 빠가르가 한해 전인 첫 등정 때 측정한 높이는 4,738m로 소쉬르가 측정한 수치가 현재 쓰이고 있는 4,807m 높이에 더 가까운 편이다.
등산의 여명기에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이 산에 올랐을까? 그것을 돌이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쉬르가 두 번째로 몽블랑을 등반할 때 빙하를 오르는 그들 일행의 등산모습을 담은 한 장의 동판화가 있다.
이 그림은 알프스 여명기에 있었던 등산 풍속화로 알프스에 관한 여러 문헌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풍속화 속의 일행은 모두가 긴 알펜스톡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끝에 갈고리가 붙어 있는 곳으로 보아 이것이 원시적인 형태의 피켈이 아닌가 짐작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모습은 3m 정도의 긴 나무막대를 여러 명이 잡고 가는 모습이다.
이것은 소쉬르가 말한 ‘이동식 스틱’으로 한 줄에 여러 명이 묶고 등반하는 안자일렌(Anseilen)의 시초라 생각되는데, 긴 막대는 로프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방법의 효과에 대해 소쉬르는 1789년에 출판된 <알프스 여행기(Voyages dans les Alpes)>에서 ‘서로가 누를 끼치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그들이 사용한 등산장비는 나무상자에 담은 기압계, 알펜스톡, 고글, 쇠징을 박은 등산화, 나침반 등 극히 초보적인 보잘 것 없는 용구들뿐이었다.
이들은 이렇듯 보잘것 없는 용구를 사용해 등산을 했지만 모든 일의 처음은 이런 식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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