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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체슨/자누북벽의 자유등반과 로체남벽 초등정

by 안그럴것같은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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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체슨/자누 북벽의 자유등반과 로체 남벽 초등정

글 이용대

 

1962년 프랑스 팀이 자누를 초등했다. 자누 북벽은 27년 후인 1989년 토모 체슨에 의해 단독으로 등정된다.

 

1989년에는 히말라야 자누(Jannu 7710m) 북벽에서 5.10급의 단독 자유등반이 성공을 거두었고, 1990년은 히말라야의 마지막 과제로 언급되어 오던 로체 남벽이 단독 초등정되어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이 두 등반은 등반 역사상 고산 등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성공시킨 주인공은 탁월한 등반 능력을 갖춘 슬로베니아 출신의 토모 체슨(Tomo Cezen)이다. 1980년대 들어 그가 세계 등산계에 미친 영향은 파울 프로우스·벨첸 바타·발터 보나티·라인홀드 메스너 등과 같이 그 분야의 선구자들이 각각 그 시대에 미쳤던 영향들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과로 평가되어 진다.
자누 북벽은 1970년 중반부터 여러 차례 도전을 받아 왔으나, 허물어지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남겨져 있었다.
그곳은 수많은 낙석들이 하루종일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는 벽으로 7100m에서 정상 주변 암벽은 80∼90°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체 벽 중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분의 난이도는 5.11급이다.
7000m급 고소에서 5.10급 정도의 50m 크랙(Crack·갈라진 바위 틈새)의 크럭스(Crux·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곳)를 오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곳에서는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고 장갑을 낀 채로 등반을 해야하는데 이것은 악몽이다. 왜냐하면 5.9급의 등반이 7000m 고소환경에서 행해질 때는 5.11∼5.12급 정도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89년 4월 27일 새벽, 체슨은 5200m 지점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그가 가지고 떠난 장비는 아이스바일 2자루·크램폰·예비 피크·하켄과 아이스하켄 몇 개·6㎜ 로프 50m·침낭과 비박색 뿐이었다. 침낭과 비박색은 무게로 인해 등반에 방해가 될 경우는 중도에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외에도 예비 선글라스·헤드 랜턴·장갑·바라클라바(목출모)와 정어리 통조림 2개·치즈과자 2개·식수 1ℓ 등 배낭의 무게는 6㎏을 넘지 않았다.
등반 도중 무수하게 난립한 세락(Serac·빙하 위에 생기는 빙탑) 지대에서 90°에 가까운 눈·얼음·바위의 혼합 구간을 통과했고, 2∼3㎝ 두께의 얼음이 유리판 같이 뒤덮인 까다로운 슬랩(Slab·매끄러운 경사를 이룬 넓은 바위 표면) 형태의 구간을 여러 차례 올랐다. 이런 베르글라(Verglas·바위 표면에 엷게 붙은 살얼음) 지대를 오른다는 것은 고도의 등반 기술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2800m의 거벽에서 5.10급의 자유등반 크럭스와 A2급 구간을 여러 차례 오른다는 것은 매우 가혹한 일이었다.

 

 

 



단독 자유등반으로 자누 북벽 도전

그는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서 손가락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좁은 크랙 10여m를 힘겹게 통과했다.
때로는 하켄을 박고 걸리(Gully·바위가 도랑처럼 파여진 곳)에 도달하기 위해 팬듈럼 트래버스(Pendulum traverse·로프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옆으로 횡단하는 기술)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팬듈럼 할 때 크램폰과 바위의 마찰로 불꽃이 튀었고, 팬듈럼으로 얼음이 덮인 장소에까지 몸을 날려 피크를 얼음에 휘둘러 꽂기도 하는 목숨을 건 첨예한 등반을 계속해 나갔다. 양다리 사이로 보이는 자누 북벽의 거대한 공간은 그를 빨아들일 듯한 무서운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체슨은 오르고 또 올랐다. 그는 10여 개의 하켄과 50m 로프 1동만으로 1000m에 이르는 벽을 되돌아 하강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A2급 인공등반 구간에 이르러서 첫 번째 하켄에 로프를 묶어 고정한 후 뒤쪽의 로프는 잘라버렸다.
이로써 그는 오른 구간으로 하산할 수 없게 된다. 체슨은 오후 3시 30분에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자누 정상에 섰다. 이때 이미 그의 앞에는 대단한 위력을 지닌 폭풍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정상에 선 그는 어떤 기쁨이나 안도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직도 죽음의 벽을 내려가야 하는 머나먼 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산하기로 한 일본대의 루트는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그는 한번도 쉬지 않고 빠른 걸음을 재촉하면서 계속 내려갔다. 폭풍은 점점 더 심해져 더 이상 하산하기가 어렵게 되자 6600m 지점에 있는 크레바스 속으로 들어가 비박을 했다.

 


바람은 크레바스 안에 눈가루를 퍼부었다. 그는 컴컴한 크레바스 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은 채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웠다.
새벽 2시경, 눈보라가 잠시 멈추자 하산을 서둘렀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세락 지대를 더듬어 내려가던 중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음 절벽 끝에 도달했는데, 그의 수중에는 한 개의 아이스하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얼음을 깎아 아이스 볼라드(Ice bollard·버섯모양의 얼음턱)를 만들어 그곳에 로프를 걸고 하강했다. 50°정도의 완만한 얼음 빙사면에 이르러서 로프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로프 20m로 다음 경사면을 무사히 하강했다. 그는 출발한 지 40시간만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상태로 베이스캠프에 돌아 올 수 있었다.
7000m급 고소의 벽에서 5.10급 정도의 크럭스를 단독 자유등반으로 오른다는 것은 놀라운 성과일 수밖에 없다.

 

토모체슨의 자누 북벽 단독등반은 히말라야 등반에 분명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사건이었다. 그는 미래에 있을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망하고 있다.
“내가 이런 방법으로 등반을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법으로 등반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것은 내 수준에 적합한 등반 방식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등반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등반 양식에 하나의 징조가 될 것이 분명하다.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앞으로 보편화될 것이고, 모든 벽들을 알파인 스타일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동안 신비에 쌓여있던 8000m의 신화는 사라졌다. 클라이머들은 높은 고산에서 기술적인 루트를 열기 시작할 것이다. 알파인 등반만이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다. 그것 또한 진보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진정한 등반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노멀루트에서 찾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체슨은 모든 클라이머들이 꿈꾸어 오던 길을 열었다. 이제 고산에서도 5.13급 온사이트 능력을 갖추고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해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알파인 클라이밍과 스포츠 클라이밍의 관계에 대해서 “스포츠 클라이밍은 등산에서 출발했으나 알파인 하고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스포츠다.
일부 알파인 클라이머들이 이 스포츠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이 스포츠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누 북벽을 등정한 뒤 토모 체슨은 고산 등반에 필요한 소중한 체험을 안고 히말라야에서 마지막 과제로 남겨져 있던 로체 남벽으로 달려간다. 로체 남벽은 그때까지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난벽 중의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다.


1975년 이탈리아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이 벽에서 패퇴의 고배를 맛본 라인홀트 메스너 조차도 이 벽을 가리켜 ‘서기 2000년의 벽’이라고 부르면서 당시의 기술로는 오르기 어렵고 앞으로 20년 후에나 등반이 가능한 곳이라고 평한 곳이다.
그는 ‘가볍고 신속한 단독 등반만이 고소의 벽이 지니고 있는 여러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자누 북벽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로체 남벽에 적용시킨다.
그는 어려운 등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일에 뛰어났다. 과거 여러 차례 로체 남벽에서 실패했던 원정대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듣고 미처 깨닫지 못한 점들을 상세히 파악하여 대비책을 세웠다. 그리고 치밀한 전술을 짰다.
그가 계획한 주된 전술은 한낮에는 휴식을 취하고 주로 야간에 신속하게 등반하여 눈사태와 낙석의 위험에 대처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전술이 성공을 거두자 1975년 이탈리아 원정대의 대장으로 이 벽에서 참패를 당한 맹장 리카르도 카신은 “로체 남벽은 마치 걷고 있는 산처럼 움직이면서 계속하여 낙석과 눈사태를 퍼붓는다”고 표현하면서 야간등반을 감행한 토모 체슨의 판단은 현명한 전술이었다고 평가했다.

 

 

 



‘서기 2000년의 벽’을 허물다

로체 남벽은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 동안 일본·이탈리아·유고·폴란드·프랑스 등이 13차례나 줄기차게 도전했으나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1973년 일본대가 최초로 도전했으나 역부족이었고, 1975년 봄에는 카신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원정대도 두 번의 눈사태를 맞고 무릎을 꿇었다. 한밤중에 거센 바람의 소용돌이와 함께 흘러내린 눈사태는 이탈리아 팀의 베이스캠프를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풍압과 분설은 베이스캠프를 거대한 운동장처럼 초토화시켰고, 장비를 넣어둔 상자와 30㎏ 무게의 산소통들은 베이스캠프로부터 1㎞나 떨어진 곳까지 밀려버렸다.
카신이 로체 남벽에서 돌아와 패장의 모습으로 기자들 앞에 섰을 때 한 기자가 “로체 남벽은 정말 오를 수 없는 곳인가요?”하고 물었다.


카신은 “아마 20년 후 누군가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20년 후에 누군가 오른다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1981년에는 유고 원정대가 남벽 8000m 지점까지 오르고 실패했으며, 1985년에는 폴란드 원정대가 8100m 지점까지 올랐고, 프랑스 원정대 역시 실패했다.
첫 등정은 카신의 예언이 있은 지 15년 만인 1990년 4월 24일 토모 체슨에 의해 64시간만에 단독등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등정은 체슨 이후에 고전적인 스타일로 이 벽을 오른 소련 팀에 의해 등정 의혹이 제기된다. 소련의 세르게이 베르쇼프가 네팔 당국자에게 그런 곳을 단독으로 오른다는 것은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의혹의 발단이 되었다. 이 말을 프랑스 기자가 언론에 보도하면서부터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 토모 체슨은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일을 해낸 사람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단지 불가능하다는 그 자체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오른 증거가 필요하다면 정상에 남긴 피톤을 확인하라”고 응수했다.


1990년 4월 9일, 루클라 비행장에 내려 카라반을 시작한 토모 체슨 일행은 의사 1명과 기자 1명의 단촐한 팀이었다.
4월 15일 카라반을 끝내고 추쿵 마을에서 반시간 거리인 해발 49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로체샤르 남동릉의 7150m까지 한국 원정대가 설치해 놓고 간 고정 로프를 따라 네 번이나 오르며 고소순응을 끝마쳤다.
로체는 자누 보다 800m나 더 높아 고소순응을 잘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고소순응 과정에서 남벽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4월 22일 베이스캠프에서 1시간 거리인 5200m 벽 밑에서 오후 5시에 출발했다.
장비는 침낭·비박색·아이스바일 2자루·아이젠·헬멧·하버스·빙벽용 하켄과 암벽용 하켄 몇 개·여벌의 장갑과 양말·고글·카메라·6㎜로프 100m와 식량과 여벌 옷을 챙겼다. 식량은 치즈·초콜릿·포도당·치즈 과자·커피 3ℓ를 보온병에 준비했다.
손에 들거나 몸에 착용한 장비를 제외하고는 배낭 무게가 9㎏을 초과하지 않았다. 커피 3ℓ는 3㎏의 무게였으나 스토브와 코펠의 무게와 식수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는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야간에 등반하기로 하고, 1981년 유고 팀이 출발한 지점보다 훨씬 왼쪽으로 등로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15시간을 물 한 모금 마시거나 쉬지 않은 채 줄곧 올라가 4월 23일 오전 8시에 해발 7500m 지점에서 좋은 비박지를 발견한다. 비박지 바로 위에는 오버행이 가로막고 있어 떨어지는 낙석을 피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는 얼음이 엷게 깔린 70∼80°경사의 바위 부분만 빼고는 65°경사의 눈·얼음이 혼합된 구간이라 별 어려움 없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비박지에서 매트리스를 펴고 앉아 간단한 식사를 했다.
기온이 의외로 따뜻하여 우모 침낭을 몸 위에 덮은 채로 아이젠을 신은 채 잠을 잤다.
아이젠을 벗어 놓을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에 일어나 배낭을 꾸린 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300m 가량의 긴 꿀르와르(Couloir·암벽에 깊게 파인 도랑)는 시작 부분부터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눈사태가 발생하면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이곳을 신속하게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재빠르게 스쳐갔다. 꿀르와르 기저(基底) 부분을 올라서서 가파른 암벽을 오른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횡단해야했다.
이런 고도에서 로프도 묶지 않고 동료의 확보도 받지 않은 채로 80m 길이의 살얼음이 깔린 바위 위를, 아이젠을 신고 횡단하는 것은 아찔할 정도로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횡단을 끝내자 눈·얼음으로 혼합된 50°경사의 중앙 설원이 나타났다. 이 설원에서는 눈사태의 위험이 높아 조심스럽게 루트를 선택해야 했다. 밤 11시에 8200m 지점의 록 필라(Rock pillar·바위 기둥) 아래에 도착하여 두 번째 비박을 했다.
그는 이곳의 조그만 테라스(Terrace·암벽 위에 선반 모양으로 된 쉼터)에서 앉은 채로 밤을 세웠다. 이곳은 몹시 추워 밤새 한잠도 못 잤다.

 

 

 



고산 자유등반의 지평을 열다

4월 24일 아침,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 비박지에 침낭과 매트리스뿐만 아니라 배낭과 식량 모두를 놔둔 채 가벼운 몸으로 새벽 5시에 출발했다.
눈 덮인 람페(Rampe·위로 비스듬히 경사진 밴드)가 가파르게 이어져 있었다. 람페를 통과하자 곧이어 남벽에서 제일 어려운 눈 덮인 푸석 바위로 이루어진 오픈북(Open book·책을 펴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바위) 형태의 바위가 나타났다. 간혹 수직에 가까운 60m 경사 구간을 통과하는데 3시간을 허비했다.
로프 없이 오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기에 하켄을 박고 로프를 고정하여 오른 다음, 다시 내려와 하켄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등반을 진행해 나갔다.


그는 위쪽에 설치한 하켄에 로프를 고정시켜 오픈북 맨 아래쪽까지 내려설 만큼의 길이만 남겨놓고, 로프를 끊어 나머지 길이만 갖고 오르기 시작했다. 하강할 때를 생각해서 로프를 이곳에 고정시킨 것이다. 나머지 구간의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나 고소증과 피로가 겹쳐 힘든 등반을 계속해야 했다.
마침내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상으로 휘어진 설릉을 따라 심한 바람을 이겨내면서 200m 가량을 횡단한 뒤, 마지막 50m 정도를 걸어 내려가 조그만 안부를 지나 로체 정상에 올라섰다.
4월 24일 오후 2시20분 토모 체슨의 로체 남벽 단독 등정은 이렇게 끝났다.
그는 워키토키를 꺼내 베이스캠프와 교신을 했다. “얀코,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 여기가 정상인 것 같다” 얀코는 그와 함께 원정대의 일원으로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한 의사였다. 로체 정상은 좁고 뾰족하기 때문에 피켈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자동으로 사진을 찍기에는 마땅치 않은 장소였다. 그는 정상에 오르기 30m 전에서 정상을 배경으로 미리 사진을 찍었다. 


그는 올라왔던 루트로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픈북을 다시 하강하고 전날 비박지에 두고 온 장비와 식량을 챙겨 메고 계속 내려갔다. 중앙 설원 7700m 지점 부근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 잠시 멈춘 시간이 오후 6시였다. 그는 1시간 정도 기다린 뒤 다시 하강하여 300m 꿀르와르 우측의 록밴드로 현수 하강했다. 꿀르와르로 하강한다는 것은 눈사태의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981년 이곳 남벽의 8000m 지점서 철수한 유고 원정대로부터 얻은 정보는 정확했다.
눈사태로 고정 로프는 없어졌으나 대부분의 하켄들은 그 자리에 박혀있어 하강지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20∼50m 정도의 하강 구간을 5차례나 하강한 뒤에 암벽지대를 끝내고 설사면에 내려선 시간은 밤 9시였다.
어디선가 눈사태의 굉음이 들려왔고,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7300m 지점에서 세 번째 비박에 들어갔다. 그는 서있던 자리를 조금 깎아내고 선 채로 비박에 들어갔다. 체슨이 말하는 비박이란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시간을 그냥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베이스캠프를 호출하여 날씨를 문의해 보고 곧 호전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안심한다.
이날 밤은 로체 전체가 눈사태로 떨고 있었으나 자정이 되자 구름이 걷히고, 벽 전체가 조용해졌으며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기 시작했다. 달이 없는 밤이었지만 설사면의 흰빛을 이용하여 계속 내려가 다음날 오전 7시에 벽 밑에 도착했다. 그리고 3일 뒤엔 베이스캠프를 철수하여 5월 3일 카트만두로 조용히 돌아왔다.
그의 의사는 수술기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왔으나, 그는 반창고 하나 축내지 않았다. 토모 체슨은 등반을 끝낸 후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신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이룩한 적이 있었는가? 바로 그 때의 감정이 바로 이 순간의 내 감정이다.

 

 로체는 내 영혼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실행에 옮겨야하는 그 불확실성과 모험을 종종 느끼고 싶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돌을 미지의 세계로 던져 놓고 그것을 따른다.”
새 시대를 열어 가는 거벽 등반가들은 5.12급을 온사이트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로체 남벽을 단독 등정할 당시 토모 체슨의 레드포인트 실력은 5.13b급이었다.
세계 등반사에 정통한 프랑스의 ‘로제 프리종 로슈’가 선정한 ‘세계 등반 100대 사건’에 토모 체슨의 로체 남벽 등반이 극찬되어진 점만 보아도 그의 등반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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