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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등반대와 신기록 경연장으로 변한 에베레스트

by 안그럴것같은 2021.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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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등반대와 신기록 경연장으로 변한 에베레스트
등로주의 심화와 고산의 세속화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에베레스트에서 산소기구 없이 최장 시간 체류한 네팔의 바부치리 셰르파. 그는 1999년 5월 6일 오전 10시 55분에 동생 2명과 정상에 도착, 텐트를 치고 21시간을 체류하고 하산했다.

1991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강고트리(Gangotri) 산군에서 가장 어려운 봉우리 탈레이사가르(Thalay Sagar·6904m) 북벽이 헝가리팀에 의해 등정된다. 이 봉우리는 지구 전체를 놓고 보아도 남미의 세로토레와 더불어 가장 어려운 봉우리 중의 하나로 꼽힌다.
낮지만 더 어려운(loss lofty but highly difficult) 봉우리를 추구하려는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할 만한 대상지가 탈레이사가르 북벽이다.
‘악마의 성’이라 부르는 이 봉은 헝가리팀이 직등 꿀르와르를 우회해 오름으로써 완전한 직등 루트를 만들지 못했다. 탈레이사가르는 빙·설·암벽이 뒤섞인 혼합등반지로 북벽 직등 루트는 아직도 오르지 못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
한편 1993년은 세계암벽등반의 중심지가 된 요세미티 엘캐피탄(El Capitan)의 노즈(Nose)를 한 여성이 최초의 자유등반으로 오르는데 성공한다. 이 등반은 세계 최강의 남성 클라이머들도 해내지 못한 등반이었다.

북벽 직등을 허용하지 않은 탈레이사가르

탈레이사가르 첫 등정은 1979년 6월 영·미 합동대에 의해 북서면 꿀르와르로 이루어졌다.
이후 북동벽 루트가 많은 클라이머들의 표적이 되었다. 198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영국원정대가 북동벽의 등정을 노렸으나 실패한다. 세 번째의 도전에서는 정상 100m를 남겨두고 철수했다.
이때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나 대원 중 조 브라운(Joe Brown)이 비박 장비가 들어있는 배낭을 떨어뜨리는 실수로 기회를 놓친 것이다. 북동벽 루트는 1984년 폴란드팀의 안드레이 촉(Andrezej Czok)과 한스 크리스티앙 도세티(Hans Christian Doseth)에 의해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된다.


1991년 9월, 헝가리팀의 페터 데카니(Peter Dekany)와 아틸라 오스바트(Attila Ozsvath)가 북벽 루트 초등에 성공했다. 그러나 북벽은 많은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에 헝가리팀은 상단의 암벽 부분은 오르지 못하고 북서릉으로 마지막 500여m를 우회해서 정상에 오른다. 결국 이들은 위쪽의 변성암(Metamorphic Rock·퇴적암의 일종으로 엷게 깨어지는 성질의 바위) 지대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 후 많은 등반대가 북벽 루트를 내려고 시도했으나 완벽한 북벽 등반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6개 원정팀이 북벽을 노리고 등반했으나 한 팀도 성공하지 못했다. 1993년 대구합동대가 북벽 6400m 지점, 1994년 우정원정대가 6500m 지점, 1994년 연세대산악회가 6400m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그쳤다. 이후 1995년 목포전문대팀이 6600m 지점, 1996년 경상대산악회가 6630m 지점, 1997년 충주건국대산악부는 6630m 지점까지 도달한다. 


1998년에는 김형진·신상만·최승철이 북벽 신루트 개척등반 도중에 6800m 지점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 만다. 1999년 봔트클럽원정대가 6700m 지점까지 오른 후 철수한다. 2000년에는 울산대산악부의 정일웅·김준모 대원이 북서릉을 통해 정상을 오른다. 이 팀의 등정은 북벽은 아니었으나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정상 등정이었다.
2003년에는 한국의 마운틴하드웨어팀이 북벽 등반을 시도했으나 6600m 지점에서 등반을 포기했다. 이로써 한국은 통산 8차례나 북벽 등반을 시도했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90년대 슈퍼 우먼의 출현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고봉과 거벽에 대한 도전양상이 남녀 구분 없이 차츰 첨예화되어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기록과 사건들이 속출한다.
1994년 9월, 린 힐(Lynn Hill)이라는 여성 클라이머가 고도차 1000여m에 이르는 엘캐피탄으로 오르기 위해 사전연습을 마친 후 그레이트 루프 피치만 인공등반을 하고 나머지 피치 모두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마무리했다.
그녀는 9월 19일 저녁 10시부터 등반을 시작하여 2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전 피치를 선등하여 다음날 저녁 9시에 등반을 마쳤다. 34피치에 달하는 노즈는 1957년 미국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워렌 하딩(Warren Harding)이 다양한 인공등반 기술을 구사하며 초등했던 루트다.
이곳이 린 힐의 자유등반 초등으로 최고 난이도 등급이 5.13b급으로 매겨졌다. 그녀는 시마이의 마세크리티퀘를 올라 여성 최초의 5.14급 등반을 해내기도 한다.
1995년 5월에는 영국의 알리슨 하그브리스(Alison Hargreaves)라는 주부가 북동릉을 통해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기록은 메스너 이후 15년만에 이룩된 성과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 후 같은 해 8월에 K2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등정했으나 하산 중에 시속 160㎞의 강풍에 날려 실종된다. 다음날 하산하던 스페인팀은 7300m 지점에서 가열기가 장착된 알리슨의 등산화 한 켤레를 발견한다.
그녀는 알프스 6대 북벽을 모두 올랐으며, 특히 1988년에는 아이를 낳으면 산에 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라면서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아이거 북벽을 오르기도 한다. 아이거 등반 후 일부 언론으로부터 야망과 명성 때문에 임신 중에 등반을 했다 하여 비난을 받는다.
1992년에는 마터호른 북벽을 동계 단독등반으로 성공시켰고, 동계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악천후 속에서 단독 등정으로 성공시킨다. 그녀는 에귀드미디 북벽과 몽블랑 뒤타클을 올랐으며 마터호른 북벽은 영국 여성 최초의 등반기록이다.

당시 그녀의 경쟁 상대는 프랑스의 유명한 여성산악인 캐서린 데스티 벨로였다. 두 여성은 경쟁 속에서 의미있는 등반을 성공시켰다.
등산을 위해 학문의 길마저 포기한 알리슨은 등산과 대학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옥스퍼드대학 진학조차 포기한 채 등산에 모든 열정을 불태운다. 단조롭고 틀에 박힌 일상생활에 대한 반항으로 산과 모험을 삶의 방편으로 택한 것이다. 알리슨의 주요한 등반 활동을 엮은 책이 '엄마의 마지막 산'라는 제호로 그녀가 죽은 뒤에 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책은 그녀의 남편 제임스 발라드(James Ballard)와 두 아이들이 직접 K2를 트레킹 하면서 추모의 형식으로 쓰여졌다. 또한 로스와 에드 더글라스가 공저로 엮은가 전기물로 출간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상업등반대의 부작용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소장비의 발전으로 고산은 점차 낮아졌고, 등산의 대중화는 점차 산을 세속화시켰다.
1996년에는 등반 능력을 돈으로 살수 있는 상업등반대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상업등반대는 1인당 65000달러를 지불하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고객을 올려준다. 에베레스트는 세계 최고의 높이를 지닌 산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 오르길 원했고, 상업등반대의 출현은 최고봉 등정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시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듯이 고객의 수요가 급증하자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상업등반대다. 그러나 등반능력을 돈으로 살수는 없었다. 상업등반대가 활동한 결과, 8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부작용도 불러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망자 중에는 베테랑급 고소 등반가들도 포함되어 더욱 충격을 주었다.

상업등반대의 가이드로 활동한 미국의 스코트 피셔(Scott Fischer)와 에베레스트를 다섯 번이나 오른 뉴질랜드의 롭 홀(Rob Hall)과 같은 세계 수준급의 산악인들도 그들의 고객 때문에 함께 죽음을 당해야 했다. 1996년 5월 10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후 6시20분까지 약 24시간 동안 벌어진 대참사는 에베레스트의 해발 8810m 지점인 힐러리 스텝과 7900m의 사우스콜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날 사고는 남봉을 지나 정상 직하 힐러리 스텝에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몰려 오르고 내려오면서 장시간을 기다리는 정체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기상이 급변한 가운데 눈보라가 몰아닥치자 고소증세와 체력저하로 탈진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탈출이 늦어진데서 비롯되었다


이날의 비극은 강한 폭풍설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으나상업등반대의 무리한 운영이 더 큰 참사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이 사고로 4개 팀의 고객과 가이드, 셰르파 등 8명이 최후를 맞았다. 우체국 직원에서 의사와 백만장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상업등반대의 고객으로 희생되었다. 더그 한센이라는 미국의 우체국 직원은 등정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모은 돈 전부를 상업등반대에 내주고 목숨을 잃었다.
돈을 주고라도 정상에 오르고 싶어했던 간절한 소망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과 다소의 기본기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일 수 있으나 크램폰 조차 제대로 신어본 적 없는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고객을 정상에 올리려는 그릇된 상업적인 경쟁심리와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의도가 부른 부작용이었다.

 

이날 뉴질랜드의 롭 홀이 리드한 상업등반대는 대장 이하 7명이 등정하고, 하산하던 중 롭 홀을 포함하여 대원 2명, 셰르파 2명이 죽었다.
같은 날 스코트 피셔가 이끄는 상업등반대도 11명이 등정하고 하산하던 중 스코트 피셔와 대원이 함께 목숨을 읽었다. 10일에서 11일 사이에 모두 8명이 희생되었고 두 팀의 리더 5명 가운데 3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났으나 롭 홀 등반대의 일원으로 참가, 불과 10여분 차이로 죽음의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 기자가 <아웃사이드>지에 생생한 르포기사를 싣자 전세계가 깜짝 놀란다.
존 크라카우어는 이 때의 참상을 책으로 엮어 "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제호로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미국내 비소설분야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상업등반대의 문제는 1997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국제산악인회의’에서 첫 의제로 토의되기도 했다. 이 참사가 일어난 1년 뒤에 가이드와 함께 등반길에 오른 5명 전원이 사망한 일이 또 일어났다. 그러나 상업등반은 이런 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찰스 허스튼은 “이제 클라이밍은 순수 스포츠가 아니며 비즈니스가 됐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입만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위험이 많을수록 수입도 오른다”고 일침을 놓았다.
또 에베레스트를 네 차례나 오른 유명한 가이드인 피터 애선즈는 “상업등반대에 참가한 고객들은 자기가 정상 정복의 티켓을 샀다고 생각하며, 에베레스트 등반이 스위스의 산악열차처럼 수월하게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세계 최고봉이 돈 많은 벼락부자들에게 팔리고 있다고 분개했으며, 등산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가 상업주의로 오염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제 21세기의 등산은 어느 산의 지리적인 정복이나 탐험이 아니라 대자연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최근 들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노력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기록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에베레스트가 색다른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다.

 

 

 



신기록 경연장이 된 세계 최고봉

1990년 5월, 색다른 방법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시도되었다. 해수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상에 오르는 최고의 등고 기록이 나왔다. 8850m의 등고 모두를 오른 최초의 사람은 호주의 매카트니 스네이프(Macartney Snape·34세)다. 그는 1990년 2월 인도의 항구도시 캘커타 해변(0m)을 출발, 장장 700㎞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까지 걸어간 후 등반을 시작하여 1990년 5월 11일에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
또한 이보다 더 긴 여정을 거쳐 등정에 성공한 기록도 나왔다. 1995년 2월, 스웨덴의 골란 클롭은 스톡홀름에서 자전거로 출발, 유럽대륙을 횡단한 다음 터키∼이란∼파키스탄∼인도를 거쳐 이듬해인 1996년 2월, 장장 12500㎞를 달려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까지 혼자서 장비와 식량을 옮긴 뒤 등반을 개시하여 5월말에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등반을 끝내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오던 길을 역으로 달려 9월말 경에 스톡홀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등정 기록은 네팔 당국이 허가해 준 루트를 벗어났다고 해서 네팔 정부는 공식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해발 높이는 8850m(현재 공인된 높이)로 이는 해수면에서부터 측량한 높이지만 이 산을 오를 때는 이 높이 모두를 등반하지 않고 베이스캠프가 되는 5400m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실제 등고 거리는 이에 못 미친다. 매카트니와 골란의 등반은 8850m를 모두 오르기 위해서 해수면 높이부터 시작해야 에베레스트의 높이 모두를 오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다.

 

1999년에는 죽음의 지대로 불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산소기구 없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최장 체류 기록도 나왔다. 네팔 셰르파 바부치리(Babuchiri·35세)는 1999년 5월 6일 오전 10시 55분에 동생 2명과 함께 정상에 도착하여 텐트를 치고 21시간을 체류한 뒤 다음날 오전 8시에 하산해 최장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01년 4월, 11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던 중 제2캠프에서 사진을 촬영하다 크레바스에 추락하여 사망한다.

 

바부치리의 정상 체류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며 아직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에베레스트 등정에 속도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단 시간 등정 기록은 2003년 5월 26일, 10시간 56분 46초를 기록한 네팔의 셰르파 락파 겔루(Lhakpa Gelu)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네팔산악협회(N·M·A)가 주관한 스피드 클라이밍 원정에서 이룩한 기록으로 이때 그는 산소를 사용했다. 그의 등정 횟수는 통산 10회에 이르고 있다.
락파 겔루의 기록은 3일전인 2003년 5월 23일 셰르파 펨바 도르제(Pemba Dorjie)가 이룩한 12시간 45분의 기록을 2시간 이상 단축한 것이다.
20시간대로 등정 속도를 단축시킨 최초의 인물은 프랑스의 마르크 파타르(Marc Batard·37세)다.
1988년 9월 26일 단독등반으로 정상에 오른 마르크 파타르의 기록은 22시간 30분이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98년 10월 17일 네팔의 셰르파 가지(Kaji)가 이룩한 기록은 20시간 24분으로 파타르의 기록을 2시간 경신했고, 22년 뒤엔 2000년 5월 21일에는 셰르파 바부치리가 16시간 56분만에 무산소로 정상에 올라 가지의 기록을 경신한다.

 

2003년은 에베레스트가 초등된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1659명이 이 산의 정상을 올랐으며 이들 중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110명뿐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등반대 일로 생계 수단을 삼는 셰르파들이다.
아파(Appa) 셰르파는 1990년 5월 첫 등정 이후 2002년까지 12회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개인 최다 등정기록을 세웠다. 그 다음은 앙리타(Angrita) 셰르파다. 그는 1983년 5월 무산소로 첫 등정에 성공한 이후 1996년까지 10차례나 무산소로 등정했으며, 1988년에는 동계무산소 등정을 성공시킨다. 2002년 5월 17일, 일본의 토미야수 이시카와는 65세 176일의 나이로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고령 남성 등반자가 된다.
같은 해 5월 16일에 이시카와보다 하루 앞서 등정한 와타나베 다마에로가 63세 176일의 나이로 정상에 올라 여성 최고령 등정자가 된다.

 

이렇듯이 21세기에는 고봉에서의 등반 행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기록들이 속출하고 있다.

자유등반의 세계에서는 5.9 등급을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등급으로 여겨왔으나 기술체계의 향상으로 현재는 5.15b급의 세계까지 열렸다.
등산장비의 발달은 산의 고도를 낮추었고, 많은 정보가 축적되면서 등반 양상이 빠르게 진전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 고봉과 대암벽에서 인간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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