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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밧 참사

by 안그럴것같은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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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봉 도전의 뒷이야기와 전후 프랑스의 도약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밧 도전의 참사
글 이용대

 

거봉 도전 시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희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뒤를 이을 8천 미터 등정 성공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 무수한 도전, 그 좌절과 희생의 아픈 기록 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1934년 봄, 에베레스트에서는 터무니없는 단독 등반이 있었다. 윌슨(Wilson)이라는 37세의 영국 퇴역 군인은 만용에 가까운 단독행을 시도했다. 그는 비행기로 도달할 수 있는 에베레스의 최대 높이까지 오른 다음 산허리에 부딪혀 착륙한 다음 정상까지 걸어 오른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인도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를 압수 당했다.
다질링에 도착한 윌슨은 입국 허가조차 받지 못했으며, 결국 셀파 3명을 고용해 티베트로 밀입국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노스 꼴 밑에 캠프를 설치한 후 한해 전에 영국 등반대가 남기고 간 식량 데포 지점을 찾아낸다. 윌슨은 이 식량으로 연명하면서 매일 같이 단독으로 노스 꼴을 향하여 등산을 감행했지만 결국 열악한 고소 환경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제 5차(1935년) 영국 등반대에 의해서 텐트가 있던 자리에서 발견된다. 그의 텐트는 바람에 갈갈이 찢겨져 텐트 팩과 일기장만 남아 있었다.
인류 최초의 8천미터 도전이 시작된 낭가파르밧에서는 비극의 역사가 이어졌다. 낭가파르밧에서 일어났던 첫번째 비극은 1934년 7월 8일 아침부터 시작된다. 이 참사의 주인공은 독일의 2차 낭가파르밧 원정대다.
독일 원정대는 7월 6일 8캠프(7480m)를 설치하고 정상까지 2백여 미터를 남겨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정상까지는 불과 4∼5시간이면 족한 거리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날 밤부터 불기 시작한 세찬 폭풍설은 산 전체를 휘감은 채 다음날까지도 그칠 줄 몰랐으며, 7월 8일에는 폭풍의 기세가 한층 더 했다. 이틀 동안 텐트에 갇혀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대원들은 정상 등정의 의지를 접은 채 아침 일찍 8캠프를 떠난다.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은 이때부터 막을 연다. 대원 슈나이더(Schneider)와 앗센부렌너(Aschenbrenner)는 3명의 셀파를 데리고 선발대로 출발, 본대는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폭풍설이 맹렬한 기세로 불고 있는 가운데 이들은 산 아래를 향하여 움직여 나갔다. 앗센부렌너와 슈나이더가 3명의 셀파와 함께 7캠프까지 내려와 셀파들을 남겨 둔 채 깊은 눈과 폭풍설을 뚫고 6캠프와 5캠프를 거쳐 그날 밤늦게 4캠프에 도착 이곳에 머물고 있던 지원대와 합류한다. 이들은 위에 남아 있는 전원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안고 밤새 기다렸으나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7캠프에서 헤어진 3명의 셀파는 어떻게 된 것일까. 셀파 3명은 이날 6캠프 가까이 하산한 후 눈 구덩이를 파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이튿날 온종일 폭풍설 속을 헤매면서 사력을 다해 하산하다가 설동을 파고 또 하룻밤을 지새운다.
7월 10일 셀파 3명이 하산하고 있을 때 후발대로 뒤쫓아 내려오던 4명의 셀파와 합류했으나 이중 3명의 셀파는 5캠프에 도착하기 전에 쓰려졌으며, 나머지 4명은 빈사 상태가 된 채 가까스로 제 4캠프에 도착한다. 그동안 4캠프에 머물던 지원대는 여러 차례 구조대를 출동시켰으나, 폭풍설과 깊은 눈 때문에 5캠프까지도 접근 할 수 없었다.

 

 

 



벨첸바하를 잃은 낭가파르밧의 첫 비극

한편 8캠프에서 후발대로 출발한 메르클(Merkl) 대장과 3명의 대원 그리고 셀파 8명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들 후발대가 8캠프를 출발했을 때는 모두가 원기왕성 했었다. 그러나 모진 폭풍설이 앞을 가로막아 전진할 수 없게 되자 비박을 한다. 추위와 강풍 속에서 12명은 침낭 세 개를 가지고 하루종일 굶주린 상태에서 밤을 지새운다. 이날 밤 벨첸바하(Welzenbach)는 침낭도 없이 맨바닥에서 비박을 한다. 이날 밤 셀파 1명이 죽는다.
다음날인 7월 9일, 셀파 3명은 하루를 더 이곳에서 쉬기로 하고 남았으나 이중 1명은 숨을 거둔다. 셀파 안체링(Ang Tsering)과 케레가 7캠프까지 내려오니, 먼저 도착해 있던 메르클과 벨첸바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은 텐트의 눈을 파내고 휴식을 취한다. 이미 식량은 바닥이 났고 일행은 굶주린 채 밤을 보내야 했다. 벨첸바하에게는 34살의 젊은 나이를 마감하는 생의 마지막 밤이었다.
훗날 그가 이 산에서 죽기 전까지 기록했던 등반 일기가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알프스 북벽의 맹장이던 벨첸바하도 이 산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마지막 생존자는 메르클 대장, 셀파 앙체링, 케레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들 세 명은 벨첸바하의 유해를 텐트에 눕힌 채 6캠프로 출발한다.
메르클은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치 지쳐 있어 능선의 안부에 눈굴을 파고 비박을 한다. 이날 밤 메르클과 케레는 한 장의 시트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휴식했으나 안체링은 시트도 깔지 않은 채 모포 한 장만으로 혹한의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인 14일, 아침 안체링은 눈굴을 빠져 나와 아래쪽을 향하여 큰소리로 구원 요청을 했으나, 산 아래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때 메르클은 너무 쇠약해져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상태였다. 케레는 원기왕성 했지만 대장과 함께 있기로 했다. 용감하고 충직한 안체링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4캠프로 출발한다.
폭풍설을 뚫고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던 안체링은 그날 저녁 늦게 동상과 굶주린 몸을 이끌고 4캠프에 도착한다.
8캠프를 출발한 지 일주일만이다. 안체링의 보고로 산 위에 두 사람의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슈나이더와 앗센브렌너는 필사의 노력으로 구조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눈굴에 남아 있던 메르클과 케레는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고, 사력을 다해 움직였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메르클이 먼저 숨을 거두고 뒤이어 케레가 죽는다. 훗날 케레의 죽음은 숭고한 셀파 정신의 발로라고 찬양되기도 했다. 그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으나 대장과 고용인이라는 관계를 떠나 운명을 같이 한 동지로서 끝까지 함께 한다.
1934년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는 열 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채 막을 내린다. 이후에도 독일은 1937년 열여섯 명의 목숨을 이 산에 묻고 마는 또 한 차례의 비극을 맞는다. 낭가파르밧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스물 다섯 명을 희생시키는 조난 사상 유래가 없는 최대의 비극적인 기록을 세운 것이다.
첫번째 비극은 이 산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츠 베히톨트(Fritz Bechtold)가 <비극의 낭가파르밧>이란 제목으로 패배의 기록을 남겨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망한 대원은 메르클 대장과 벨첸바하 그리고 알프레드 드레셀(Alfred Drexel), 울리 비란트(Ulli Wieland)이며, 이들과 운명을 함께 한 쎌파는 케레, 다크시, 루브, 누로보, 도리에, 타시 등이다.

 

 

 

 

 

독일 다시 낭가파르밧에서 16명 전원 눈 속에 묻혀

1937년 독일은 3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세 번째 원정대를 낭가파르밧에 파견한다. 칼빈(Karl Wien) 대장과 독일 최정예 등반대원 6명을 선발하고 셀파 9명을 고용했다. 이들의 등반은 2캠프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눈사태로 텐트가 부서져 일시 후퇴한 후에 재공격을 시도한다.
6월 7일 4캠프(6220m)를 설치한 후 이곳에 물자를 운반하여 전진기지로 활용한다. 11일에는 전 대원이 4캠프에 집결한 후 12일에는 5캠프(6635m)를 설치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등반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가슴에 맺힌 정상 등정의 숙원을 풀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거봉 도전시대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6월 14일 밤과 15일 새벽 사이에 일어났다. 라키오트(Rakhiot) 피크 사이의 빙벽에서 떨어진 대형 눈사태가 4캠프를 덮쳐 삽시간에 전 대원을 죽음의 세계로 묻어버렸다. 대장 이하 7명의 전대원과 셀파 9명 총 16명이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영원히 눈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이 참사가 발견 된 것은 3일 후인 6월 18일이었다. 팀 주치의인 루흐트가 베이스캠프로부터 사고 지점까지 올라왔을 때 4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에는 어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길이 4미터 폭 150미터의 눈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이 비보는 즉시 독일로 타전되었으며 곧 수색대가 비행기로 현지에 도착한다. 7월 15일부터 조난자 발굴이 시작되었다. 3∼4미터 두께로 얼어있는 눈을 파내는 어려운 발굴 작업 끝에 대원 2명의 시체가 있는 텐트 한 동을 발견했다. 2명 모두 침낭 속에서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으며 한 대원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는 12시 20분에서 멎어 있었다.
시계 바늘이 정지한 시간을 조난 시간으로 추정한다. 계속된 발굴작업 끝에 추가로 대원 세 명이 잠든 텐트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원들의 텐트는 거대한 얼음덩어리 밑에 깔려 발굴을 포기했다. 셀파의 시신은 9명 중 1명만 발견되었다. 희생된 셀파 중 파상 노르부(Pasang Norbu)는 1934년 독일 원정대의 최초 조난 시 8캠프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산에서 희생된 것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으며 한 나라에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일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1950년에는 영국인 3명이 라키오트 빙하를 탐색하러 왔다가 2명이 사망한다.
1953년 낭가파르밧이 초등되기 전까지 이 산에서 죽은 사람은 58년 동안 모두 31명이었다. 이 가운데는 낭가파르밧 최초의 도전자이자 알버트 머메리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가 8천 미터에 도전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는 1895년 8월 4일 구르카 병사 2명과 함께 디아마패스(Diamapass·6200m)의 빙벽 너머로 사라졌다. 히말라야에서 있었던 최초의 희생이었다. 등로주의를 제창하며 항상 새로운 등반을 시도해온 희대의 반항아 머메리는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고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는 유언과 같은 말을 그의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의 마지막 장에 남긴 채 빙벽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이 책은 그가 낭가파르밧으로 출발하기 두 달 전에 마치 유언서처럼 출간되었다.

 

 

 



전후 프랑스의 도약

종전(終戰)후, 철의 시대가 다시 개막된 것은 그랑드 조라스와 아이거 북벽이 재등되면서부터다.
그 동안 세계대전으로 등산활동은 5년 동안의 공백기를 갖는다.
프랑스의 가스통 레뷔파(Gaston Rebuffat)와 에드와르 프랑도는 1945년 그랑드 조라스 워커능을 재등하였으며, 1947년 프랑스의 리오넬 테레이(Lionel Terray)와 루이스 라슈날(Louis Lachenal)은 아이거 북벽을 9년만에 재등하여 프랑스의 명예와 긍지를 일시에 되살리는 이벤트를 마련한다.
그 동안 유럽의 알피니즘은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주도해왔지만 이 두 등반을 계기로 프랑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랑드 조라스와 아이거 북벽의 재등은 초등과 같이 세계 산악계의 극찬을 받는다. 모두가 6급 알피니즘의 최상의 경지라 할만한 등반이었다. 아무튼 이것을 시작으로 전쟁 후 철의 시대가 다시 문을 열었으며, 프랑스는 그 여세를 몰아 인류 최초로 8천 미터 거봉의 초등정을 이룩한다.
가스통 레뷔파는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권의 산악저서를 저술했으며, 산악영화도 여러 편 만들었다. 그는 저서와 영화를 통해 등산의 대중 접근을 성공시켰다.
클라이밍 입문서인 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힌 책이며, 은 산악문학을 한 차원 높인 저서로 많은 독자들에게 산을 동경의 대상으로 유도했다.
한편, 세계대전 후 한국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1945년 9월 조선산악회가 창립된다. 초대회장은 진단학회장과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고 있는 송석하가 선임된다. 창립 발기인 19명중 11명이 백령회 출신 산악인들이었다.
조선산악회는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 명칭을 한국산악회로 개칭한다. 이 단체는 초기에 국토 구명사업을 시작하여 국, 내외의 산악운동을 전개하며 현재 4천 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이 단체는 국토 구명사업과 학술조사, 자연보호, 해외원정, 등산교육, 학생 산악운동 지도육성, 일반등산의 지도보급, 등산의 안전대책과 조난 구조활동 등의 사업을 펴왔다.
대외적으로는 U.I.A.A(국제산악연맹) 가맹단체이며, 1980년 9월 문교부 산하 1047-470호로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법인화한다. 대외 명칭은 ‘Corean Alpine Club(C.A.C)’이다. 이 단체는 1968년부터 계간지 <산>과 연보<한국산악>을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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