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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즈스탄 등반기 (최원일)

by 안그럴것같은 202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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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일, 사진 : 등반대

 

동우형과 민호와 나는 인수봉 등반 가듯이 가벼운 차림으로 공항에서 약속한 시간에 만나 키르기즈스탄으로 향했다. 서로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는 잘 통하고 있었다. 키르기즈스탄의 수도인 비쉬켁의 Red Fox라는 장비점에 들러 Gas를 구입하고 마트에서 여러 가지 식량을 구입한 후 산으로 향했다. 산 입구에서 식량과 장비를 두 번에 걸쳐 산장까지 옮기기로 했다. 첫날은 등산로 입구를 못 찾아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너덜지대인 계곡을 가는 과정에 동우형이 다리를 다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식량운반은 제대로 된 등산로를 찾아 무사히 마쳤는데 아침에 하산도중 살얼음이 언 바위에 민호가 미끄러져 다리 쪽에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빈 배낭을 맨 하산길이어서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배낭이었다면 어디 하나 부러졌을 것이다.

산장주변에는 우리 말고 산장지킴이와 구조대원 1명만 있고 등반하러 온 사람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하루에 꼭 세 번씩 비가 온다. 우리는 텐트에서 참 재미없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 했다. 이럴 때 민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원정대원 중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한 명 정도 포함되어 있어야 서로 심심하지도 않고 좋다고. 그래도 민호가 보여준 카드 마술은 흥미롭고 시간 보내기에 유용했다.

등반을 위해 바이취취케이(4515m), 코로나(4860m), 세메노프(4674m)봉을 정찰하고 민호와 나는 바이취취케이의 쉬바프(Shvav)루트(러시아 등급체계 5)를 등반하기로 결정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우형의 배웅을 받으며 바이취취케이로 향했다. 쉬바프 루트 앞까지는 산장에서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으며 아직까지 별다른 징후 없이 좋은 편이었다. 장비를 착용하고 첫 피치 스타트를 하는데 어제 내린 비로 바위는 아직 젖어 있었고 이끼가 살아 있어 미끄럽고 썩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정상까지 몇 피치를 등반하나 꼭 기억하고 싶었지만 등반에 열중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 얼마만큼 왔지?” 하고 꼭 물어보게 된다. 약 서너 피치를 온 것 같은데 아직까지 볼트나 하켄은 찾아 볼 수 가 없다. 운 좋게 하켄하나 정도 눈에 띄면 그제서야 코스 같은 느낌이 들이 기분이 좋았다.

오전 11시 쯤 되었을까, 습하고 많은 수분을 포함한 진눈깨비가 약 30분 정도 내렸다. 잠시 등반을 멈추고 대기하다가 기상이 조금 좋아지자 나는 바로 출발했다. 간간이 어려운 동작을 요구하는 구간이 나오면 긴장은 했지만 잘 진행해 나갔다. 맨손으로 홀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손을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등반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구간에서 눈에 살짝 가려진 이끼를 잘못 딛어 순간 미끄러졌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추락해 보는 거라 뭐라고 소리 질러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입에서는 벌써 낙석이라는 소리가 나왔고, 그다음 추락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다행히 민호가 잘 받아주어 약 15m정도의 추락에 그쳤다. 왼쪽발목이 살짝 아파오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추락을 경험해 본 등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떨어지는 순간 많은 사건들이 뇌리를 스친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

민호를 안심시키고 다시 등반에 나선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천둥과 번개도 같이 울부짖는다. 민호와 나는 숨을 곳도 없고 그냥 눈을 맞으며 대기중이다. 쪼그리고 앉아 자켓으로 온몸을 감싸 최대한 보온할 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약 두 시간을 그렇게 추위에 떨면서 보내야 했다. 겉으로 표시는 안했지만 걱정이 많이 됐다. 등반해야 할 루트를 쳐다보면 내가 손으로 잡아야 할 홀드와 발로 딛어야 할 곳에는 많은 눈이 쌓이고 있다. 물론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다행이 눈은 멈추었고 암벽화를 신고 추락했던 나는 릿지화로 바꾸어 신고 등반하기로 했다. 휠씬 더 감각이 좋고 눈과 이끼에서 암벽화보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등반과 추락, 그리고 다시 등반에 집중하다 보니 몇 피치나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짧게는 한 피치가 40m에서 길게는 60m까지 등반 한 것 같다.

눈을 치우며 시린 손을 불어가며 정신없이 등반에 집중하여 루트가 끝난 지점에 도착했다. 암벽등반은 끝났는데 이제부터는 눈이다. 빙벽화로 갈아 신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설사면을 올라야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해보는 러셀이라 힘도 많이 들었지만 숨이 많이 찼다. 몇 걸음 못가서 헉헉거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안자일렌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약 200m의 설사면을 약 두 시간에 걸쳐서 러셀하며 올랐다.

밑에서 보았을 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정상 같았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정상은 저 멀리 도망가 있고 우리의 기운의 모두 빠졌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몸도 많이 지쳐있었다. 민호와 나는 정상은 가지 못했지만 쉬바프루트 등반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발길을 돌려 하산길에 들어섰다. 평지를 만날 때까지 허벅지와 무릎까지 차오는 눈과의 싸움에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갔고 글리세이딩을 해보려고 했지만 워낙에 습설이라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평평한 길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왼쪽 발목이 무척이나 아파온다. 텐트까지는 약 두 시간 정도 더 가야하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어디선가 동우형이 우리를 부르는 환청까지 들리곤 한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텐트에 도착하니 동우형이 코코아를 끓여주었다. 잊을 수 없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의 최고의 맛난 동우표 쉬바프코코아 감사합니다.

발목이 점점 부어올라 걷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틀 동안의 냉찜질로 약하게나마 거동은 하게 되었지만 하산길이 걱정되었다. 다행이 동우형과 민호가 많은 짐을 나누어지고 나는 간단하게 가벼운 것만 챙겨, 무사히 하산을 마쳤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많은 등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지만 지난 2010년 돌로미테 등반과 이번 바이취취케이 등반이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큰 발판이 되었다는 것에 희망을 가져본다. 특별하고 즐거운 시간 함께한 동우형과 민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 전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회를 주신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새로운 곳에 도전하는 최원일이 되어 찾아뵙겠습니다.

 

 

 

 

 

등반루트의 러시아식 등급체계

 

<등급을 결정하는 기본 요소>

 루트 중 어려운 구간의 기술적인 어려움과 빈도

 봉우리의 높이 및 어려운 정도와 관계없이 루트의 핵심적인 구간의 높이

 마지막 캠프에서부터의 루트의 길이

 루트의 평균 경사도

 적절히 구성된 팀이 등반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

 

이들 기본적인 요소들 외에도 루트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산의 드러난 정도, 지형의 특색, 규모, 홀드와 크랙 및 스탠스들의 양과 모양, 루트의 명확함, 필요한 등반기술, 특정한 인공적 요소의 필요성, 객관적 위험, 외부 지원의 가능성, 하강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위험이 적으며 가장 실용적인 방법

 

러시아 등급체계는 구간별 기술 등급과 루트의 전체 등급으로 나뉜다.

 

<기술적등급>

(easy) - 넓은 너덜지대나 설릉으로,  30도까지의 잔돌들이 쌓인 암벽릿지 또는 빙설벽. 기본적인 알파인 등반장비

(simple) - 30도 이상의 빙설 구간 및 암벽지대로 일반적인 등반기술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알파인 등반장비

(moderately difficult) - 35~45도에 이르는 빙설구간. 인공등반기술까지는 필요치 않은 좋은 홀드가 많은 가파른 암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만일 이 구간으로 하강을 한다면 프리클라이밍도 가능하다. 기본적인 알파인 장비 외에 일반적인 암벽등반 장비가 필요하다.

(difficult) - 프리클라이밍으로 돌파 가능한 가파른 암벽구간이 있다. 55도에 이르는 가파른 빙설구간. 배낭을 메고 등반하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힘들다. 로프를 이용한 하강을 해야 한다. 완전한 암벽 및 알파인 등반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very difficult) - 적절한 홀드가 부족해 때때로 인공등반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50도 이상의 각도와 어려운 눈처마 능선으로 이루어진 빙설벽 구간이다. 완전한 암벽 및 알파인 등반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exceptionally difficult) - 수직 또는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암벽지대로 홀드와 크랙, 스탠스 등이 거의 없다. 대부분 인공등반으로 돌파해야 한다. 어려운 믹스클라이밍 또는 가파른 빙벽구간이 포함된다. 최대한의 알파인 등반능력이 필요하다.

 

<루트의 전체등급>

루트 전체 등급은 1에서 6까지, 각각은 A B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1B - 2000~5000미터에 이르는 암벽 봉우리의 쉬운 등정으로, 빙설구간 또는 혼합구간을 포함한다.

2A - 2000~60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에서 5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해야 할 경우 또는 이 고도 대에서의 종주 등반으로서, 급에 달하는 암벽피치에 빙설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또는 100미터 이상의 급 빙설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2B - 2000~6000미터급 암벽/빙설벽 봉우리의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으로서, 짧은 구간이지만 급의 암벽 또는 빙벽 구간을 포함한다. 확보지점을 위해 하켄이 필요하다.

3A - 2500~6500미터급 암벽/빙설벽 봉우리의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 600미터 이상의 급 암빙벽 구간이 계속된다.

3B - 2500~6500미터급 암벽/빙설벽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6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 20~30미터의 암벽구간을 포함할 수도 있고, 200~300미터의 급 빙설벽 구간을 포함하기도 하며, 또는 짧지만 급 구간을 포함하기도 한다.

4A - 2500~7000미터급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6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 루트에는 20~50미터의 급 암벽구간이 포함되거나 또는 200~300미터 또는 그 이상의 급 빙설벽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6~8시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며 하켄을 이용한 확보지점이 필요하다. 종주등반이라면 3B급의 5개 루트가 연결되어 있거나 그에 상응해야 한다.

4B - 2500~7000미터급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6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으로서 40~80미터의 급 암벽구간 또는 짧은 급 암벽구간을 포함하거나, 300~400미터 또는 그 이상의 급 빙설벽 구간을 포함하는 경우. 8~10시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며 확보지점을 위해 8~10개 또는 그 이상의 하켄이 필요하다. 종주등반이라면 4A급 루트 2개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5A - 3000~7500미터급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6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 ~급의 긴 암벽구간 및 몇몇은 급에 달하는 암벽구간을 포함하거나, 300~400미터 또는 그 이상의 급 빙설벽 구간을 포함한다. 10~15시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며 확보지점을 위해 20~40개 또는 그 이상의 하켄이 필요하다. 종주등반이라면 최소한 4B급 루트 2개와 4A급 루트 1개를 포함해야 한다.

5B - 3000~7500미터급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7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종주 등반. ~급의 긴 구간에 50미터 가량의 급 구간, 그리고 짧은 급 구간을 포함하며, 또는 600~800미터 이상의 급 빙설 구간을 포함한다. 15~20시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며 확보지점을 위해 30~50개 또는 그 이상의 하켄이 필요하다. 종주등반이라면 최소한 5A급 루트 2개를 포함해야 한다.

6A - 3600미터 이상 봉우리에서의 표고차 800미터 이상의 등반을 통한 등정 또는 이 고도대에서의 암벽 또는 믹스 지대를 통한 종주 등반. 평균적으로 ~급의 구간이 지속해 나타나며 20미터 또는 그 이상의 급 구간을 포함한다. 40~50시간 또는 그 이상이 소요되며 확보지점을 위해 100~150개 또는 그 이상의 하켄이 필요하다. 종주등반이라면 최소한 5B급 루트 3개를 포함해야 한다.

 

* 우리가 이번에 등반했던 바이취취케이의 쉬바프루트는 총 10개의 피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5개의 피치가 기술적등급 6급이고 루트의 전체등급은 5A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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