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각산이냐, 북한산이냐

by 안그럴것같은 2022. 3. 29.
반응형
SMALL
 

북한산 지명에 대하여

 

⊙ 삼각산이냐, 북한산이냐?

 

서울의 성북, 강북, 은평구와 경기도 의정부·양주, 그리고 고양 경계에 있는 높이 837m의 북한산은 198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이자 종산(宗山)이기도 하다. 북한산(北漢山)은 북한산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 중악(中岳), 귀봉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우선 삼각산과 북한산이라는 두 이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삼각산이란 지명의 유래는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白雲臺)를 비롯하여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의 세 봉우리가 개성 또는 양주 땅에서 보면 마치 세 뿔처럼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시 강북구의 주장은, 북한산의 여러 이름 중 삼각산은 고려 성종 때부터 1900년대 초까지 천 년 동안 불려 왔다. 이에 대한 근거는, 고문서인 팔도군현지도와 해동지도, 광여도에 삼각산으로 적혀있으며,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이룩한 후 한양의 지세는 하늘을 열어 이룩한 땅/ 굳건한 큰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쳤고… 라고 노래한 시와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 주전론(主戰論)을 편 문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청나라 볼모로 끌려가기 직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하고 고국산천을 떠나는 비탄한 심정을 읊은 시조에서도 삼각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강북구가 아는지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때 문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상록수의 심훈은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하며 조국광복을 염원하였고, 가수 서태지가 다닌 서울북공고 교가에도 삼각산 맑은 정기 월곡에 서려…하며 삼각산을 노래하고 있다. 강북구는 이렇게 유래 깊은 삼각산이라는 고유의 지명이 일제시대 창씨개명과 함께 단행된 창지개명으로, 단지 한강과 한성의 북쪽에 있고 남한산에 대비 된다 하여 북한산으로 바뀐 것이라며 이제는 제 이름을 찾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경기도 고양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삼국시대부터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돼 온 것으로 나타나 있고 서울대 규장각에서 찾아낸 조선조 숙종 때의 北漢誌에도 北漢山郡이라는 명칭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北漢誌는 백제 개로왕 때인 서기 132년 최초로 축성된 북한산성을 조선조 숙종 때인 1711년 재축성하고 이때 북한산과 관련한 문화·역사·지리를 상세하게 정리한 문헌이다. 고양시는 북한산이 삼각산에 비해 산성(山城)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더 쓰인 것은 사실이나 일제의 잔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강북구와 고양시 주장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 역사와 함께 생몰했던 또 다른 이름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홈페이지를 통해 국립공원 북한산을 소개하며 삼국사기의 기록, 즉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고자 한강이북지역에 내려와 도읍을 물색코자 북한산에 올랐다는 기록과 신라의 진흥왕이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를 비봉(碑峰)에 세우고 557년 한강이북지역에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고 북한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개로왕’(455-475) 개루왕이라고 써 놓고 있어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있고 또 북한산의 명칭을 소개하면서 역사편 소개와 달리 최초의 명칭은 삼국시대 때부터 부아악(負兒岳),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렸고 고려 성종 이후부터 1900년 초까지 삼각산, 조선 중기까지 또 화산(華山), 화악(華岳)으로 불렸으며 1900년대 초 이후부터 북한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하여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명칭 편에서는 강북구 주장을, 역사 편에서는 고양시 편을 들어주는 듯 앞뒤가 맞지 않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여튼 북한산의 최초의 명칭이며 삼국시대까지 불렸다는 부아악(負兒岳)이란 인수봉의 모습이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등에 짐 질 負 아이 兒를 써서 부아악이라 불렀다 한다. 필자는 북한산 또는 북악산의 지명 중 적어도 하나는 아마 이 부아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중악(中岳)이라는 북한산의 또 다른 이름은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 많은 지도를 펴낸 눌재 梁誠之(14151482)가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으로 하고 한반도 중심에 있는 북한산을 중악으로 삼자는 진언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 북한산의 이름으로 불렸다는 화산(華山)은 대개 도읍지의 진산(鎭山)을 부르는 이름이며, 한산(漢山)은 큰 산이라는 의미의 한 뫼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한강(漢江)과 대칭을 이루게 하였다는 얘기가 있고 귀봉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백운대와 인수봉이 우이동에서 보면 마치 소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 호연지기와 국운을 논하던 북한산의 세 봉우리

 

국립공원 북한산에는 조선 숙종 때(1711) 쌓은 길이 8km 북한산성이 있다. 이 산성에는 모두 14개의 문이 있었는데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대서문 등이 남아 있거나 복원되어 있고 산중에는 북한산 이궁터를 비롯하여 태고사, 삼천사, 승가사 등 여러 사찰과 사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 독립군과 의병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하여 북한산성 내의 시설과 사찰 대부분을 불태웠다고 한다.  1927년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에 쇠 난간을 설치하고 쇠말뚝을 박아 백두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내룡(來龍)의 맥을 끊고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하였다. 쇠말뚝은 근래에 들어 비로소 철거되었다.

북한산에는 최고봉인 백운대의 거북이 등과 같은 정상 암벽과 대포알을 똑바로 세워 놓은 것 같은 인수봉, 그 곳에 오르면 세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만경대가 3각을 이루고 있다. 먼저 만경대는 이곳에 오르면 세상의 온갖 경치를 다 구경할 수 있다고 해서 문경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조선을 건국하며 무학대사가 이곳에 올라 한양의 도읍지를 살폈다 해서 국망봉으로도 불리는데, 세 봉우리 중 백운대와 인수봉의 정상은 모두 고양 땅이고 만경대는 강북구와 경계에 있다. 인수봉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 잡고 살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도 있고, 조선조 7대 임금 세조가 이 봉우리에 올라 호연지기를 길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북한산의 명승지 면적 27 3,000여㎢ 중 92%는 고양시에 걸려 있고 세 봉우리의 지번은 고양시 북한산동 1 1로 되어있다. 북한산에는 이 세 봉우리 외에도 불교식 이름이 붙은 보현봉, 문수봉, 원효봉,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었던 비봉, 노적가리의 전설을 지닌 노적봉 등 빼어난 봉우리들이 제각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울 시가지는 물론 경기도 일대와 인천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는 북한산을 두고 시인들은 서울의 축복, 서울의 은총이라고도 하는데 어느덧 서울의 상징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북한산에 대한 지명 이야기를 쓰면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인터넷을 이용하여 북한산을 주제어로 정보검색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오늘 북한산 반달곰 8마리 방사라는 기사들이 즐비하게 뜨는데 전혀 몰랐고 너무 반가웠기 때문이다. 우리 관내 북한산에 반달곰 8마리를 방사하였다면 그놈들이 제대로 적응하여 자손만대를 누려 갈 수 있도록 해 줘야지 하고 황급히 상세 내용 보기를 클릭했더니 지난해 들여온 북한산(北韓産) 반달곰 8마리를 자연 적응 훈련을 끝내고 지리산에 방사하였다는 얘기였다.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