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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파르밧의 비극

by 안그럴것같은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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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부터 인류 최초의 8천 미터급 자이언트봉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낭가파르밧(8,125m)에서는 비극의 역사가 이어졌다. 낭가파르밧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 비극은 1934 7 8일 아침부터 시작된다. 이 참사의 주인공은 독일의 2차 낭가파르밧 원정대다. 독일 원정대는 7 6 8캠프(7480m)를 설치하고 정상까지 2백여 미터를 남겨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정상까지는 불과 45시간이면 족한 거리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날 밤부터 불기 시작한 세찬 폭풍설은 산 전체를 휘감은 채 다음날까지도 그칠 줄 몰랐으며, 7 8일에는 폭풍의 기세가 한층 더 했다. 이틀 동안 텐트에 갇혀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대원들은 정상 등정의 의지를 접은 채 아침 일찍 8캠프를 떠나 하산하기 시작했다.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은 이때부터 막을 연다. 대원 슈나이더와 앗센부렌너는 3명의 셀파를 데리고 선발대로 출발, 본대는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폭풍설이 맹렬한 기세로 불고 있는 가운데 이들은 산 아래를 향하여 움직여 나갔다. 앗센부렌너와 슈나이더가 3명의 셀파와 함께 7캠프까지 내려와 셀파들을 남겨 둔 채 깊은 눈과 폭풍설을 뚫고 6캠프와 5캠프를 거쳐 그날 밤늦게 4캠프에 도착 이곳에 머물고 있던 지원대와 합류한다. 이들은 위에 남아 있는 전원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안고 밤새 기다렸으나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7캠프에서 헤어진 3명의 셀파는 어떻게 된 것일까. 셀파 3명은 이날 6캠프 가까이 하산한 후 눈구덩이를 파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이튿날 온종일 폭풍설 속을 헤매면서 사력을 다해 하산하다가 설동을 파고 또 하룻밤을 지새운다.

7 10일 셀파 3명이 하산하고 있을 때 후발대로 뒤쫓아 내려오던 4명의 셀파와 합류했으나 이중 3명의 셀파는 5캠프에 도착하기 전에 쓰려졌으며, 나머지 4명은 빈사 상태가 된 채 가까스로 제 4캠프에 도착한다. 그동안 4캠프에 머물던 지원대는 여러 차례 구조대를 출동시켰으나, 폭풍설과 깊은 눈 때문에 5캠프까지도 접근 할 수 없었다.

한편 8캠프에서 후발대로 출발한 메르클 대장과 3명의 대원 그리고 셀파 8명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들 후발대가 8캠프를 출발했을 때는 모두가 원기왕성 했었다. 그러나 모진 폭풍설이 앞을 가로막아 전진할 수 없게 되자 비박을 한다. 추위와 강풍 속에서 12명은 침낭 세 개를 가지고 하루 종일 굶주린 상태에서 밤을 지새운다. 이날 밤 벨첸바하는 침낭도 없이 맨바닥에서 비박을 한다. 이날 밤 셀파 1명이 죽는다.

다음날인 7 9, 셀파 3명은 하루를 더 이곳에서 쉬기로 하고 남았으나 이중 1명은 숨을 거둔다. 셀파 안체링과 케레가 7캠프까지 내려오니, 먼저 도착해 있던 메르클과 벨첸바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은 텐트의 눈을 파내고 휴식을 취한다. 이미 식량은 바닥이 났고 일행은 굶주린 채 밤을 보내야 했다. 벨첸바하에게는 34살의 젊은 나이를 마감하는 생의 마지막 밤이었다.

 

 

 

 

훗날 그가 이 산에서 죽기 전까지 기록했던 등반 일기가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알프스 북벽의 맹장이던 벨첸바하도 이 산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었다.

낭가파르밧(8,125m)의 정상을 200m 미터 앞둔 마지막 8캠프에서 거센 폭풍설을 만나 후퇴를 거듭하여 6캠프까지 내려오는 중에 셀파 5명과 당대 최고의 등반가 벨첸바하를 비롯하여 대원과 셀파 등 모두 8명 탈진과 저체온증으로 사망한다.

이제 마지막 생존자는 메르클 대장, 셀파 앙체링, 케레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들 세 명은 벨첸바하의 유해를 텐트에 눕힌 채 6캠프로 출발한다. 메르클은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치 지쳐 있어 능선의 안부에 눈굴을 파고 비박을 한다. 이날 밤 메르클과 케레는 한 장의 시트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휴식했으나 안체링은 시트도 깔지 않은 채 모포 한 장만으로 혹한의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인 14, 아침 안체링은 설동을 빠져 나와 아래쪽을 향하여 큰소리로 구원 요청을 했으나, 산 아래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때 메르클은 너무 쇠약해져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상태였다. 케레는 원기왕성 했지만 대장과 함께 있기로 했다. 용감하고 충직한 안체링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4캠프로 출발한다.

폭풍설을 뚫고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던 안체링은 그날 저녁 늦게 동상과 굶주린 몸을 이끌고 4캠프에 도착한다. 8캠프를 출발한 지 일주일만이다. 안체링의 보고로 산 위에 두 사람의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슈나이더와 앗센브렌너는 필사의 노력으로 구조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설동에 남아 있던 메르클과 케레는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고, 사력을 다해 움직였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메르클이 먼저 숨을 거두고 뒤이어 케레가 죽는다. 훗날 케레의 죽음은 숭고한 셀파 정신의 발로라고 찬양되기도 했다. 그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으나 대장과 고용인이라는 관계를 떠나 운명을 같이 한 동지로서 끝까지 함께 한다.

1934년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는 열 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채 막을 내린다. 이후에도 독일은 1937년 열여섯 명의 목숨을 이 산에 묻고 마는 또 한 차례의 비극을 맞는다. 낭가파르밧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스물다섯 명을 희생시키는 조난 사상 유래가 없는 최대의 비극적인 기록을 세운 것이다.

첫 번째 비극은 이 산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츠 베히톨트가 <비극의 낭가파르밧>이란 제목으로 패배의 기록을 남겨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망한 대원은 메르클 대장과 벨첸바하 그리고 알프레드 드레셀, 울리 비란트이며, 이들과 운명을 함께 한 쎌파는 케레, 다크시, 루브, 누로보, 도리에, 타시 등이다.

이렇게 독일에 있어 낭가파르밧은 운명적인 산이 되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은 전쟁에서도 비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며, 전후 등산을 통해 침체된 민족정신의 회복하고자, 다시 숙명의 낭가파르밧에 도전하고, 드디어 1953년 철인 헤르만 불이 마지막 캠프에서 단독으로 정상등정에 나서 낭가파르밧에 독일의 국기를 꽂고 내려오게 된다.

1937년 독일은 3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세 번째 원정대를 낭가파르밧에 파견한다. 칼빈(Karl Wien) 대장과 독일 최정예 등반대원 6명을 선발하고 셀파 9명을 고용했다. 6 7 4캠프(6220m)를 설치한 후 이곳에 물자를 운반하여 전진기지로 활용한다. 11일에는 전 대원이 4캠프에 집결한 후 12일에는 5캠프(6635m)를 설치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등반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가슴에 맺힌 정상 등정의 숙원을 풀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6 14일 밤과 15일 새벽 사이에 일어났다. 낭가파르밧 옆의 라키오트피크 빙벽에서 떨어진 대형 눈사태가 4캠프를 덮쳐 삽시간에 전 대원을 죽음의 세계로 묻어버렸다. 대장 이하 7명의 전 대원과 셀파 9명 총 16명이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영원히 눈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이 참사가 발견 된 것은 3일 후인 6 18일이었다. 팀 주치의인 루흐트가 베이스캠프로부터 사고 지점까지 올라왔을 때 4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에는 어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폭 150미터의 눈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이 비보는 즉시 독일로 타전되었으며 곧 수색대가 비행기로 현지에 도착한다. 7 15일부터 조난자 발굴이 시작되었다. 34미터 두께로 얼어있는 눈을 파내는 어려운 발굴 작업 끝에 대원 2명의 시체가 있는 텐트 한 동을 발견했다. 2명 모두 침낭 속에서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으며 한 대원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는 12 20분에서 멎어 있었다.

시계 바늘이 정지한 시간을 조난 시간으로 추정한다. 계속된 발굴작업 끝에 추가로 대원 세 명이 잠든 텐트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원들의 텐트는 거대한 얼음덩어리 밑에 깔려 발굴을 포기했다. 셀파의 시신은 9명 중 1명만 발견되었다. 희생된 셀파 중 파상 노르부(Pasang Norbu) 1934년 독일 원정대의 최초 조난 시 8캠프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산에서 희생된 것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으며 한 나라에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일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1950년에는 영국인 3명이 라키오트 빙하를 탐색하러 왔다가 2명이 사망한다.

1953년 낭가파르밧이 초등되기 전까지 이 산에서 죽은 사람은 58년 동안 모두 31명이었다. 이 가운데는 낭가파르밧 최초의 도전자이자 알버트 머메리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가 8천 미터에 도전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는 1895 8 4일 구르카 병사 2명과 함께 낭가파르밧을 오르던중 디아마패스(6200m)의 빙벽 너머로 사라졌다. 히말라야에서 있었던 최초의 희생이었다.

등로주의를 제창하며 항상 새로운 등반을 시도해온 불세출 등반가 머메리는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고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는 유언과 같은 말을 그의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낭가바르밧이 있는 지역의 명칭)>의 마지막 장에 남긴 채 빙벽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이 책은 그가 낭가파르밧으로 출발하기 두 달 전에 마치 유언서처럼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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