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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국의 에베레스트 원정 요약

by 안그럴것같은 202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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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77년 당시 한국대의 에베레스트 원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1971년 봄. 대한산악연맹은 한국으로선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미터 급 고산에 원정대를(대장 박철암 외 10명) 파견했고, 그 대상은 에베레스트 산군에 위치한 로체샬(Lhotse Shar, 8,400m)이었다. 로체샬은 등반성이 어렵기로 정평이 난 산이었으며, 우리가 입산 신청할 당시 거의 유일한 8,000미터 급 미답봉(未踏峰)이었다. 그러나 바로 1970년 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초등정(初登頂)에 성공했다.

당시 우리 원정대는 고산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이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너무 벅찬 대상을 오르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등반을 계속했으나, 국내처음으로 8,000미터 선을 넘어섰다는 것에 만족하고, 등정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 원정대의 귀중한 경험이야말로 훗날 에베레스트 원정의 준비, 훈련, 대원선발 등의 과정에서 실로 소중한 초석(礎石)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로체샬 원정대는 등반 외에 중요한 임무 한 가지를 더 갖고 출국했다. 네팔(Kingdom of Nepal) 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네팔은 어느 산도 한 시즌 1개국에만 허가를 내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했다.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히말라야(Himalaya) 원정에 국민소득 250달러 수준에 불과한 개발도상국이 처음으로 도전장을 냈고, 네팔 관광성의 회신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1973년 12월에야 외무부를 통해 전달되었다. 드디어 입산허가서가 발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4년 후인 1977년 가을 시즌이었다. 입산허가 받는데 3년, 입산하는데 또 4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성공률이 극히 저조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가을 시즌이다. 대한산악연맹은 이제 본격적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준비를 시작해야했다. 우선 당장 새해 초에 전국에서 모집한 대원들로 훈련대를 편성해 눈 덮인 지리산을 향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입산신청서를 제출한 1971년부터 무려 7년간에 걸친 준비와 훈련과정이 있었고, 설악산 동계훈련 중 눈사태로 세 명의 대원을 잃는 안타까운 비극을 겪기도 했다. 1971년 에베레스트 입산신청이래 국내훈련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77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 훈련일정>

* 제1회 동계 훈련

1972년 2월 18일 - 2월 24일 설악산 잦은바위골 백미폭

* 제2회 동계 훈련

1973년 2월 24일 - 3월 2일 설악산 내설악 일원

* 77KEE 1차년도 동계 훈련

1974년 1월 26일 - 2월 6일 지리산 칠선계곡

* 77KEE 1차년도 하계 훈련

1974년 4월 13일 - 4월 14일 북한산 도봉산

1974년 5월 11일 - 5월 12일 북한산

1974년 7월 20일 - 7월 21일 도봉산

* 77KEE 2차년도 동계 훈련

1975년 1월 26일 - 2월 9일 설악산 공룡능선 일원

* 77KEE 3차년도 동계 훈련

1976년 2월 10일 - 2월 21일 설악산 공룡능선 외

* 77KEE 4차년도 동계 훈련

1977년 2월 11일 - 2월 17일 오대산 일원

 

77KEE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대한산악연맹은 기존의 행사 외에 전국등산지도자세미나, 등산문제 심포지엄(Symposium), 산악장비전시회 등 제반행사의 대부분이 에베레스트 준비일환으로 일관(一貫)되었으며, 1976년의 동계훈련 중 최수남 부대장과 송준송, 전재운 대원이 안타깝게 눈사태로 희생되자 그 결의와 열정과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원정대의 성공을 위해선 반드시 사전에 네팔을 방문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의 통신 등 열악한 사정으로 볼 때 네팔 현지에서의 정찰활동을 통한 각종 정보수집과 전지훈련 등이 필수조건이었음은 물론이다.

대한산악연맹은 과감히 2년에 걸쳐 정찰대(偵察隊)를 현지에 파견했고, 이 정찰대의 활동은 본 원정대의 성공적 등반에 큰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정찰대 파견활동은 다음과 같다.

 

* 제1차 정찰대 : 1975년 8월 1일 - 11월 5일 (107일간)

- 대장 최수남, 부대장 김인섭, 대원 김운영, 한정수, 김병준, 고상돈,

이원영

- 카트만두와 트레킹(Trekking) 도중의 각종 자료 및 정보수집.

- 에베레스트 제1캠프(6,100m)까지 진출.

임자체(6,189m) 전원등정, 푸모리(7,145m) 남서릉 6,200m까지 등반,

- 경비행기 타고 에베레스트 웨스턴 쿰(Western Cum) 상공에서 공중정찰.

- 귀국 후 신세계백화점에서 1주일간 사진 및 장비전시회 개최.

* 제2차 정찰대 : 1976년 9월 23일 - 11월 26일 (65일간)

- 대장 장문삼, 대원 이윤선, 조원길

- 네팔 관광성에 입산료 1,200달러 지불.

- 현지여행사 계약 및 사다와 셀파 등 현지인 고용계약

- 카트만두와 트레킹 도중의 각종 자료수집

- 미국 원정대를 통해 NASA제품의 산소통 50개 구입.

 

 

 

대망의 1977년이 되었다.

대한산악연맹은 2월에 최종 동계훈련을 마무리하고, 대원선발과 제반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원정자금 확보가 큰 문제였는데, 정부로부터 6천만 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본 원정대의 후원을 맡은 한국일보가 나머지 자금을 맡기로 했으나, 중도에 장기영 사주가 타계하시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신임 장강재 사장은 5천만 원을 지원키로 했다. 한국일보는 곧 자금마련에 들어갔다.

한국일보는 당시 국내유수기업체 중 11개 회사로부터 원정대 지원에 참여키로 약속을 받아내었다. 지원에 동참한 회사들은 대우실업, 대한전선, 대한항공, 동양나일론, 동양맥주, 미원, 종근당, 태평양화학, 한일합섬, 한국생사, 해태제과 등 총11개 업체다. 당시 각 분야에서 최고기업들이 다투어 지원에 동참했으니 범(汎)사회적인 원정대가 된 셈이다.

여기에 대한산악연맹이 1천만 원을 보태 총예산은 1억2천만 원.

 

대원선발도 확정되었다. 대장은 당시 대한산악연맹 회장이며, 처음부터 이번 원정의 기획과 추진, 준비를 일관성 있게 이끌어 온 김영도 회장이 맡았다.

등반대장은 장문삼, 등반부대장은 박상열, 이들은 71년 로체샬 원정대원들이다.

이어 대원에 이윤선(총무), 곽수웅(수송), 김명수(장비), 조대행(의료), 김영한(식량), 이상윤(장비), 한정수(장비), 김병준(수송), 고상돈(총무), 이기용(식량), 이원영(식량), 도창호(식량), 정덕환(의료), 전명찬(식량), 김운영(보도), 이태영(보도) 등 총 1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대원구성은 나중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의료를 맡았던 정덕환 대원은 당시 공군중위로 국방부에서 출국허가가 늦게 나와 애석하게도 원정을 포기해야했고, KBS-TV에서 베테랑 촬영기자인 김광남씨가 급히 합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의료는 조대행(육군소령) 대원이 혼자 맡게 되었다.

 

국내 기술진이 특수 제작한 알루미늄 사다리 100개를 비롯해, 열처리한 알루미늄 스노하켄(Snow Haken) 500개, 국산 픽스로프(Fixed Rope) 4,000미터, 텐트 30동, 카라반食, 등반食, 고소(高所)食 등을 30Kg 단위로 포장해 총 18톤에 달했다. 대형 트럭 6대에 실은 화물은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선박 편으로 인도 캘커타로 향했다. 이때가 5월 28일.

우모복, 등산화 등 상당수의 개인장비와 고소텐트, 캐트리지 등은 일본에서 구입, 항공편으로 카트만두로 보냈다.

6월 16일 선발대가 제반준비 차 먼저 카트만두로 떠나고, 모든 국내준비를 끝낸 원정대는 7월 2일 출국했다. 방콕에서 추가식품을 구입하고, 캘커타에 도착한 화물을 트럭 7대에 적재해 인도 북부의 대평원을 지나 네팔국경에서 통관절차를 마쳤다. 현지 트레킹회사가 다 해결하는 요즈음과 달리 대원들이 직접 나서서 하역, 운송, 통관 등을 처리해야 했다.

고용한 고소포터, 아이스폴 포터, 쿡, 키친보이 등과 함께 카라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연료, 현지식품 등을 구입, 낱개 포장하는 등 바쁜 가운데 각자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식수와 음식이 너무 불결하고 입에 맞지 않아 대원들은 모두 카트만두에서 한두 번씩 배탈, 설사 등으로 고생하면서, 카라반(Caravan)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7월 19일 새벽 4시, 원정대는 비장한 각오로 어둠 속의 카트만두를 떠났다. 본대가 이 도시에 입성한 후 14일 만에 출발하는 것이다. 마무리 포장작업 등 밤을 꼬박 새며 고생한 대원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약 4시간 만에 해발 736m의 람상고에 도착, 모든 화물을 넓은 초원으로 옮겨, 카라반하기 좋게 분리하고, 야영준비를 서둘렀다.

여기서부턴 현지포터를 고용해 그야말로 400Km의 머나먼 대장정(大長征)을 시작해야 한다. 도로가 전혀 없는 오로지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 산길로만 걸어야 하니 실지로는 400Km가 훨씬 넘는 셈이다.

첫걸음부터 뭔가 잘 풀리지 않았다. 짐을 운반할 포터들의 숫자가 충분치 못해 원정대는 결국 사분오열될 수밖에 없었다. 길고 험한 산길을 넘어 선두그룹이 에베레스트BC에 도착한 것이 8월 9일. 카트만두 출발 22일째, 걷기시작한지 꼭 21일 걸렸다. 그러나 뒤에서 고생고생하며 짐을 운반하느라 흩어졌던 대원들은 8월 13일에야 BC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예정에 없던 고생에 비하면 카라반 도중 분실된 짐이 겨우 두 상자였음이 다행이었다. 나이케(로컬포터의 십장)의 도주로 3일간의 포터임금을 더 지불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BC에 도착해 모든 장비. 식량 등을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매우 심각한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다름 아니라 주문한 프랑스 산소 50통이 늦게 카트만두로 운송되었고, 이를 부랴부랴 BC로 옮겼는데 모두 레귤레이터(Regulator)가 맞지 않았다. 서독제(製) 실린더에 충전해 보낸 것이다. 한마디로 무용지물. 원정대 실망은 엄청 컸다.

전년도의 2차 정찰대가 과감히 미국원정대로부터 NASA제품 산소 50통을 구해놨으니 그나마 다행인데, 공교롭게도 아이스폴(Ice Fall) 루트(Route)공작 중 프랑스제 산소 13통을 발견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이 중 12통은 신품이었다. 하늘이 주신 선물 같았다.

 

 

 

첫 번째 부딪치는 최대의 난관은 BC 바로 위에서부터 전개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험한 마(魔)의 아이스폴 지대 돌파였다. 모든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성패(成敗)가 바로 여기에 달렸다는 아이스폴 루트개척은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무겁지만 견고한 우리 알루미늄 사다리는 그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총100개 가운데 루트공작에 66개, 계속되는 보수작업에 32개를 추가 사용했으니 완벽한 준비였다.

고정로프의 경우도 1971년 로체샬 등반 때 모자라 고전했었기에 이번은 충분히 준비했다. 현지에 보관했던 1,000m, 국산 4,000m, 일제 4,000m, 프랑스제 800m 등 총 9,800미터에 달했다. 아이스폴 루트개척에 엄청나게 소모한 국산 PVC로프는 일제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등반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서둘러 미리 일부 루트 개척 작업에 들어갔던 아이스폴 지대의 상단부에 제1캠프(6,100m)를 설치한 것이 8월 15일이고, 5일 후 제2캠프(6,450m)설치, 6일 후 제3캠프(7,500m) 설치에 이어 9월 4일 사우스콜에 제4캠프(7,986m)를 설치했다.

선두의 루트개척과 뒤에서 각 캠프로 올리는 물자지원이 어느 정도 끝나자 김영도 대장은 제2캠프에서 1차 등정조(登頂組)를 발표했다. 박상열 부대장과 사다인 앙 푸르바. 이외는 모두 지원조인 셈이다.

등정조는 6일 제2캠프를 출발해, 8일 제5캠프(8,500m)를 설치하고 다음날 정상등정을 시도했다. 남봉(南峰, 8,750m)에 도착한 후 계속 전진하여 힐러리 스텝(Hillary Step)을 넘어섰으나 애석하게도 산소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가 오후 4시 40분이다. 앙 푸르바가 몹시 지쳐 쓰러지자 박 부대장도 그만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했다.

당시에는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 등정은 불가능한 줄 알았고, 힐러리 스텝을 넘어선 후에는 완만한 능선을 약 15~20분 정도만 걸어가면 바로 정상인 줄도 몰랐다. 또 박 부대장은 함께 올라온 앙 푸르바가 쓰러졌는데 의리 없이 혼자서 등정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련 없이 뒤돌아선 박 부대장은 앙 푸르바를 이끌고 내려가려하나 여의치 못하자 8,600미터 고지에서의 죽음의 비박을 감행한다. 이들은 예기치 못한 ‘최고도 지점에서의 비박’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다음날 아침 무서운 정신력으로 제5캠프로 하산했고, 셀파의 부축을 받으며 무사히 제2캠프로 생환했다.

 

이어 12일, 2차 등정조 고상돈 대원과 펨바 노르부 셀파가 대원과 셀파들의 뜨거운 격려를 받으며 제2캠프를 출발했다. 위 캠프에서 대기하는 대원과 셀파들이 이들의 지원에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1차 등정조의 발자취를 따라 하루에 한 캠프씩 올라갔다.

절박한 상황이었다. 만일 이들도 실패한다면 이후 산소가 바닥나 결국 등정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듯 처절하게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9월 15일이 되었다. 새벽 5시 30분에야 이들은 제5캠프를 떠났다. 남봉에 이른 것이 9시 30분. 여기서 산소통을 새것으로 바꾸고 다시 출발한 이들은 12시 50분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서는 영광을 만끽한다.

정상은 물론이고, 각 캠프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모든 대원은 일제히 감격에 넘친 환호를 외쳤다. 가뜩이나 세수 못해 지저분한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뒤범벅이 되었다.

 

이렇게 한국원정대는 큰 사고 없이 등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결국 에베레스트 등반에 있어 몇 가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첫째, 제5캠프만 설치하고 정상에 선 최초의 원정대로 최소(最少)캠프의 기록을 세웠다.

둘째, BC에서부터 아이스폴을 통과해 정상에 설 때까지 36일 걸렸는데, 이는 1975년 영국대의 32일에 이어 두 번째 빠른 등정 기록이다.

셋째, 9월 15일 등정은 가을시즌으론 가장 빠른 기록이다. 한국대는 그동안 가을시즌에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총 14개 원정대 중 73년 일본대, 75년 영국대, 76년 미국대에 이어 네 번째로 성공한 팀이다.

이외의 기록을 보면 한국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영국, 스위스, 중국, 미국, 인도, 일본, 이태리에 이어 8번째 등정국이 되었다.

 

이를 분석하면 우리보다 먼저 등정한 국가로 서양(西洋)에선 영국, 스위스, 미국, 이태리의 4개국으로, 우리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소련 등 수많은 산악강국을 앞선 셈이다.

아시아지역에선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며 티베트인을 앞세워 등정에 성공한 중국, 히말라야 자락의 대국으로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임을 밝혀낸 그 자존심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인도, 그리고 산악선진국 일본만이 우리를 앞섰다.

물론, 이 8개국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고소 안내자이며 짐 운반자인 네팔의 셀파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밖의 기록으로 한국대는 14번째 등정에 성공한 팀이고, 고상돈 대원은 셀파를 포함해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각 캠프의 철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9월 20일엔 BC까지 철수하여 하행 카라반을 시작한 원정대는 샹보체에서 ‘필라투스포터’라는 8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24일부터 4일간에 걸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급히 카트만두로 날아온 한국일보의 장강재 사장을 비롯해 많은 기자와 교포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 원정대는 정부의 요청에 의해 태국과 홍콩, 대만을 거치며 해외동포의 환영을 받았으며, 10월 6일 귀국했다. 김포공항에서의 간단한 기자회견에 이어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펼쳤고, 많은 시민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온 국민들은 원정대의 쾌거에 환호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국내 각 일간지와 방송에서 연일 보도했다. 특히 고상돈 대원은 ‘정상의 사나이’로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김영도 대장과 고상돈 대원은 ‘체육훈장 청룡장’을, 그 외 대원은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受與)했다.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일보는 11월 한 달간 미도파백화점에서 ‘에베레스트원정대 사진 및 장비전시회’를 개최했다. 무려 120만 시민이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회는 지방으로 이어져 부산, 대구, 광주, 제주, 대전, 청주 등에서 이듬해 5월까지 개최했으며, 이어 여름철 두 달간은 미국 순회전시에 나서서 LA, 시카고, 뉴욕, 워싱톤DC, 달라스, 휴스톤 등에서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은 이래저래 무척 바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듬해인 1978년에 에베레스트원정대의 ‘전국순회강연회 및 슬라이드 상영회’가 무려 11개월간 총 94회에 걸쳐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다.

한편, 사다 락파 텐징과 등정자 펨바 노르부 셀파도 초청되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대한산악연맹은 1978년부터 9월 15일을 한국의 첫 세계 최고봉 등정일로 영원히 기리기 위해 ‘산악인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날에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담배, 우표, 각종 문구류 등 원정대의 기념품 제작은 물론, 생생한 기록물도 많이 발간되었다. 서적으로는 김광남 기자의 「여기는 정상이다」, 이태영 대원의 「정상에 서다」와 최초의 대형 사진 기록집으로 김운영 대원의 「에베레스트」가 속속 발간되었다. 이어 어린이용으로 출판한 김영도 대장의 「나의 에베레스트」는 문공부로부터 제2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20년이 지난 1997년에는 대원모두가 참여한 진솔한 기록으로 「77 우리가 오른 이야기」를 출판했으며, 2001년에는 사진집 「100일간의 대장정」을 발간했다.

한편, KBS는 30분짜리 등반영화와 60분짜리 좌담회를 제작 전국에 방영했으며, 한국일보는 원정대의 동영상을 모아 80분짜리 영화로 제작했으나 시중에 개봉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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