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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에베레스트 등반 비교

by 안그럴것같은 2024.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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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과 2007년. 이 30년의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

더욱이 인터넷의 대중화로 인한 신속한 정보교류의 발달은 그야말로 3,000년 이상의 변화만큼이나 실감케 한다.

이 30년간 급변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우리산악인들이 행하는 무상의 행위인 히말라야 원정, 특히 에베레스트 등반스타일이 과연 어떻게 변화되고, 등반장비 등은 또 어떻게 발전됐으며, 또 대체로 어떤 가치관의 변화가 있었나? 지금부터 그 시공을 오가며 두서없이 비교해볼까 한다.

 

1) 통신의 변화

30년의 변화로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국과 네팔의 국제전화통신 시스템이다.

30년 전 당시 까마득히 먼 나라 네팔로 전화를 걸려면 서울국제전신전화국(현 광화문 교보빌딩 자리)을 찾아가야만 했다. 전화신청을 서면으로 제출하고 느긋이 기다리면 대략 2~3시간이 지나서야 실내 스피커를 통해 “네팔 신청하신 분은 몇 번 전화박스로 들어가세요!” 한다.

전화박스 안에는 달랑 전화기 한 대만 놓여있다. 수화기를 들면 오퍼레이터(Operator)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잠깐 기다리라” 말한 후 일본을 통해 네팔과 연결시킨다. 또 한참을 기다리면 심한 잡음 속에 네팔의 수화자 목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아차! 실수로 전화가 끊기면 또 앞의 절차를 밟으며 부지하세월 기다려야 하기에 사전에 준비한 내용으로 빠르게 통화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현재는 집에서나, 길을 걸으며 핸드폰으로도 네팔 어디로든 직접 통화가 가능하다.

 

30년 전엔 에베레스트 BC에서 한국으로 소식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등정소식이나 지원요청 등 화급을 요할 경우 남체바잘에 있는 간이전신소로 메일러너(Mail Runner)를 내려 보내 카트만두 전신국으로 무선통신을 취하면, 전신국에서 이를 주 네팔한국대사관으로 전달해준다. 대사관에서는 텔렉스(Telex)로 본국에 보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그때는 팩스 또한 상상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초에 일본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그 정상에서 무전기로 직접 인도 캘커타 항에 정박 중인 일본상선(商船)으로 등정소식을 전하고, 이 선박이 태평양의 어느 상선을 통해 본국으로 무선통신을 보내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빨리 등정소식을 본국으로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 “해외토픽”에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에베레스트 BC에 누워서 한국의 어느 집으로든 인공위성을 통해 직접통화가 가능하고, 또 한국 어디에서도 언제든지 번호만 누르면 에베레스트로 직접 전화통화가 가능한 세상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도 유분수지 이쯤이면 기가 막힐 밖에.......

 

등반 도중 캠프 간 무선통신도 상상을 초월한다.

30년 전 BC에선 대형무전기를 사용하는데도 통화가 잘 안되어 높게 안테나를 설치해야만 했다. 전진기지격인 제2캠프도 BC와 통화가 여의치 않아 높다랗게 안테나를 설치하고, 음질이 좋지 않을 때는 텐트 밖 50미터가량 눈 덮인 길을 걸어 나가서 통화할 때도 많았다.

한국대는 당시 세계최고급의 일제 SONY 무전기를 사용했지만 2Kg이 넘는 무게에 그 부피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등반 중에는 배낭뚜껑이 아닌 배낭 안에 넣어야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높이 든 고상돈 대원의 사진을 보면 가슴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무전기를 볼 수 있다.)

 

무전기에 건전지를 함께 거론 안할 수 없다.

30년 전에는 리튬(Lithium) 배터리는 고사하고 알칼리(Alkali) 배터리도 상상 못했던 시절이다. 휴대용 무전기는 소형 1.5V 건전지 8개가 들어가는데 추운 고소에서 어찌 그리 소모가 심한지 불과 몇 십분 만에 건전지를 교체해야 했다. 때문에 등반 중에도 새 건전지를 늘 애물단지처럼 잘 보온 포장하여, 넉넉한 양을 갖고 다녀야 했다.

건전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캠프 간 통화는 결국 하루에 서너 번 시간을 정해 통화하곤 했다. 등반 중엔 통화가 여의치 않아 중간캠프에서 중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보다 무게 1/10, 부피 1/10의 휴대하기 간편한 무전기에, 건전지 교체 걱정은 전혀 없이, 언제라도 쉽게 통화가 가능하다. 조용히 말해도 아주 잘 들리는 우수한 성능에 또 한 번 격세지감을 느낀다.

 

 

 

2) 우편의 변화

30년 전 에베레스트에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는 대략 20일 이상 지나야 받아볼 수 있었다.

루크라와 샹보체에 비행장이 있긴 했지만 비정규 비행기만 간혹 다닐 때라 특히 날씨가 계속 나쁜 몬순기간에는 부지하세월이었다. 그렇다고 메일러너가 편지를 들고 람상고까지 400Km 구간을 뛰어갔다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어렵게 편지가 카트만두공항에 도착하면 이를 한국대사관으로 보내고, 대사관에서는 외무부와의 외교행랑(Pouch)을 이용해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국내에 도착해선 외무부에서 대한산악연맹으로, 대한산악연맹에서 각자의 집으로 배달했다. 이 방법이 그래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한국에서 BC로 편지를 보낼 때도 비슷한 역순이다. 우선 각자 카트만두 한국대사관으로 보내면, 대사관에서 이를 한데 모아 비정규 비행기 편으로 루크라나 샹보체 비행장으로, 이곳에서 메일러너가 편지를 받아 BC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컴퓨터라는 게 생겨나 곧바로 글을 주고받고, 심지어 사진, 동영상 등 영상물까지 바로 주고받는 세상이 됐다.

낮에 등반하는 자신의 모습을 저녁에 캠프에서 비디오로 자신이 직접 감상하는 요즈음이다. 등반보고서나 사진집이 원정대 귀국하자마자 발간되는 현실을 30년 전 당시 산악인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요즈음 사람이 당시를 생각해도 도무지 상상이 잘 안될 것이다.

3) 등산장비의 변화

등산에서 가장 기본 장비인 신발의 경우를 보자.

30년 전에는, 오늘날 이미 구닥다리가 된 플라스틱 신발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오직 가죽제품만 있었다. 이너부츠도 끈으로 묶는, 무겁고 젖기 쉬운 가죽제품이었다. 당시 한국대는 그래도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프랑스제 ‘가리비엘 마칼루’ 더블을 신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30년 전 그 신발을 신고 등산하라고 하면 너무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30년 전의 아이젠 착용은 요즘의 원터치식이 아니라, 일일이 끈으로 묶어야 했으며, 등반도중 휴식할 때마다 끈이 느슨해져 있지 않나 점검해야만 했다.

 

헤드램프의 경우, 격세지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30년 전 당시의 투박한 헤드램프는 머리에 쓰고, 연결된 건전지 통은 허리에 차거나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대형 1.5V 건전지 3개를 넣으면 잘해야 2시간정도 사용이 가능했다. 따라서 그 무거운 건전지를 예비로 각자 최소 6개씩은 갖고 다녀야 했다. 캄캄한 밤의 야간등반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성냥갑 크기의 가벼운 헤드램프에 건전지는 원정기간 내내 교체할 필요가 없다. 성능은 최소 10배 이상 더 우수하다.

 

신발 못지않게 중요한 의류도 30년 전에는 요즘 그 흔한 고아텍스, 폴리에스터, 폴리프로필렌, 스판덱스, 플리스, 윈드스토퍼 등의 원단은 듣도 보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탄생한 소위 “알파인스타일”은 그만큼 각종 장비가 발달했기에 가능하리라.

배낭, 텐트, 빙벽등반장비 등 그 수많은 장비들의 30년 차이를 일일이 비교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4) 카트만두의 변화

우선 네팔로 들어서는 첫인상을 보자. 지금의 카트만두공항은 초라한 편이긴 해도 에어컨시스템도 있고, 제법 운치 있고 현대적이다.

그러나 30년 전 당시의 원시적이고 어수선한, 그리고 수백 명에 달하는 짐꾼들의 혼잡한 공항 분위기는 정말 독특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대략 3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었다.

 

30년 전 카트만두 거리의 경찰은 대부분 콧수염을 기르며, 총이 아닌 작은 칼을 차고 있었다. 시민의 주 교통수단은 버스와 마차가 고작이고, 대부분은 걸어 다녔다. 또 시민의 80% 이상은 맨발이었다. 자동차가 많지 않았고, 택시운전수가 최고의 직업이었다.

당시 카트만두는 참 깨끗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왕국의 수도이자 전원도시였다. 신비스런 고적(古蹟)과 세계문화유산급 사원들이 도처에 즐비한 옛 도읍지로서, 정말이지 꿈속같이 포근하고 쾌적한 낭만의 도시였다. 국왕을 존경하는 시민들은 맑은 표정과 착한 성품을 지녀 늘 웃으며 명랑했다.

 

그러나 지금의 카트만두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도시의 인구는 잔뜩 늘어나 훨씬 더 넓어졌으나 시설이 뒤따라주지 못해 위생상태가 불결하기 짝이 없고, 혼잡한 거리거리마다 너무나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도시 곳곳에 산재한 그 수많은 국보급 탑과 사원 등 고적들이 관리소홀로 모두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부서지거나 더럽게 변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기가 막혀 눈물 날 지경이다.

도로는 엉망인데다가 굴러다니는 버스나 트럭, 택시는 겉만 뻔지르르하지 속은 너무 낡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미 폐차시키고도 한참이 지났을 차들이다. 이 고물차들이 내뿜는 저질 연료의 매음과 그 탁한 냄새는 곤욕스럽기 짝이 없는데, 여기에 자동차와 오토바이는 엄청 늘어나 그 매연과 소음 또한 대단하다. 세계1위라는 멕시코시티보다 더 심하다. 때문에 일부 외국인들이 시내 다닐 때 산소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진풍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부패한 정부에 대한 불신, 잦은 시위, 마오이스트(Maoist, 모택동주의자)들의 횡포, 잦은 통행금지 조치 등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시민들의 표정은 잔뜩 흐리고, 사기꾼에 도둑이 득실하고, 도시가 온통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위험천만한 매력 잃은 도시로 변해버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진정 30년 전이 그리울 뿐이다.

 

30년 전 당시 우리 교민은 기억에 아른거리지만, 공항 확장공사를 맡은 고려개발 직원 약간 명과 UNDP 소속 2명, 국가대표 축구감독 1명, 태권도선생 1명 등이 전부였던 것 같다. 가족이 몽땅 모여야 열댓 명 정도였다.

원정대원들은 카트만두 시내를 주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녔다. 시내의 중심부를 구석구석 다녀도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손짓발짓 대화에 사람들은 온순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지금의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민심은 사나워지고, 불친절하고, 불신이 가득하다. 그 착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특히 중심가의 밤거리는 자칫 방심하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바가지요금에 고약한 인심은 물론이고 치안상태가 그야말로 가관이다.

 

물론 좋아진 면도 있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첫째, 한국에 대한 이들의 이미지다. 30년 전에는 띄엄띄엄 다니는 택시를 타고 “Korean Embassy”로 가자고 하면, 꼭 북한대사관으로 안내해주었다. 한국대사관은 지도에도 없었고, “Korea” 하면 의례 북한이요, South Korea를 아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 대사관 직원도 북한은 수십 명이고, 남한은 고작 3명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네팔에서 북한과 남한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요즈음 네팔사람에게는 한국이야말로 “Korean Dream”이다. 2004년 봄에 한국에서 일할 근로자 500명을 뽑는데 무려 3만7천명의 신청자가 한국대사관 앞으로 몰려 거리가 며칠 동안 마비된 적도 있었다.

한국말 할 줄 아는 현지인도 꽤 많다.

 

둘째, 교통편의 변화다. 30년 전에는 김포공항을 출발해 홍콩(또는 타이페이)을 거쳐 방콕까지 13시간 걸렸다. 우리 민간항공조차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 국가의 영공권 조약체결이 안된 상태라 태평양 상공으로 우회해야만 했다. 방콕에선 캘커타(또는 다카)를 거쳐 카트만두로 들어갔다. 그러나 작년부터 인천과 카트만두의 직항로선이 생겨 불과 6시간 반 만에 도착한다.

 

셋째, 최근 엄청나게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찾아오기에 관광에 별 불편함이 없다.

30년 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물은 꼭 여과기로 거르고 끓인 물을 준비하여 마셨고, 저녁식사는 지저분하지만 주로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Fried chicken & rice"에 고추소스를 넣어 먹는 것이 가장 한국음식에 근접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런데 지금 카트만두에 한국음식점이 무려 20군데가 넘는다. 서로 고객유치 경쟁이 치열하다. 된장찌개나 불고기, 김치 등 밑반찬 맛이 제법 한국과 비슷하고, 김치 맛있게 담그는 현지인도 꽤 많다.

슈퍼마켓에서 생수도 쉽게 구한다. 한마디로 전혀 식사에 대한 불편이 없다. 이 또한 하나의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5) 트레킹의 변화

자, 이제 에베레스트를 향해 출발해보자.

30년 전에는 전세버스와 트럭에 짐을 싣고 카트만두를 출발해 티베트와의 국경인 장무로 연결된 도로를 약 3시간 반 정도 달리다가 ‘람상고’에서 하차했다. 이어 모든 짐을 계곡 옆 초원으로 옮겨 가지런히 부려놓고 야영을 했다.

다음날 아침 일자리 찾아 몰려든 현지인을 우리가 계약한 네팔회사에서 고용해 이때부터 약 한 달간 줄곧 걸어야하는 장장 400Km의 대 장정을 시작한다. 단 한 번도 자동차 구경을 할 수 없는 오직 험준한 산길의 연속. 거대한 산과 고개를 넘고, 계곡과 숲을 지나며 오르락내리락 하루에 꼬박 7~8시간씩 걸어갔다.

이 여정은 꿈에 그리던 에베레스트로 가는 필수요건이기에 고달픔은 전혀 생각도 안했다. 오히려 이 긴 트레킹이 등반 못지않게 그리운 추억으로 지금도 아련히 남아있다. 진정한 낭만이 여기에 있었다. 하루의 산행을 끝내고 느긋이 야영하는 맛이란 너무 멋졌다. 수백 명의 포터들이 원정대 짐을 짊어지고 가는 긴 대열도 장관이었다.

트레킹 도중 어느 산을 지나건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면 주민들은 어김없이 밭을 일구었고 집이 띄엄띄엄 있었다. 에베레스트로 향해 가는 주변의 경치는 매일매일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저 멀리 하얀 고산이 나타나면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매일 저녁 야영캠프를 칠 때마다 노천창고를 만들어 포터들이 짊어지고 오는 각종 물건을 종류별로 쌓고, 쿡과 키친보이를 데리고 대원이 직접 요리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혹 비가 안 오면 모닥불을 피우며 조용히 캠프파이어(Camp Fire)를 즐기곤 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척박한 생활에 찌든 주민들은 약을 달라고 찾아오고, 어린이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야영지에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비교적 풍요로운 농가는 대개 1층에는 소, 염소 등 가축이 있고, 2층에 사람이 살았다. 방이 따로 없는 어두운 홀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장작불 연기로 가득했다.

숲 속에선 거머리들이 떼를 지어 우리를 공격했다. 앞뒤 좌우상하로 공격하는 거머리 떼를 방어하기위해 특히 용변을 보려면 꼭 우산을 펴들고 앉은 채로 자리를 몇 번씩 옮겨 다녀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해야만 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하루에 최소한 수차례씩은 각자의 피를 거머리에게 헌납했다.

어느 집이라도 들어가 차를 마시면 파리, 벼룩, 이 등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점차 이곳 생활에 동화되어갔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여인네들은 친절했다. 지저분한 손으로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면 우린 매우 고마워했다. 처음에는 보기도 꺼림칙했던 비위생적인 지저분한 음식들에 점차 익숙해졌다. 때로는 말린 소똥위에 감자를 눌러놓고 구워 먹었다. 이 긴 트레킹을 통해 점점 네팔 시골의 정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원정대가 경비행기 타고 루크라로 바로 날아가기에 상기 트레킹을 통해 느끼는 낭만은 전혀 맛볼 수 없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30년 전에 걸어서 보름이상 걸리는 루크라 마을까지 지금은 불과 40분 만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루크라와 루크라 위쪽 마을의 변화도 엄청나다. 30년 전에는 아랫마을일수록 풍요롭고, 고도가 높을수록 가난했다. 셀파의 고향 솔로쿰부 지방은 정말이지 가난 그 자체였다.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되었다. 그 유명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곳곳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다리를 놓았으나 참으로 척박한 마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최고봉을 구경하려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그 트레킹이 루크라부터 시작하기에 그 윗마을들은 자연히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시설이 깨끗해지고 음식 등 모든 면에서 해마다 좋아지고 있다.

루크라, 남체바잘에는 요즈음 PC방, 비디오방은 물론 사우나, 나이트클럽, 서양식 바, 제과점 등도 있다. 술값, 찻값, 숙박비 등 가격은 매년 무섭게 오르고 있다.

반면에 루크라 아래쪽 마을들은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루크라 위쪽 마을로 올라가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번다.

 

30년 전 남체바잘 위는 마을이래야 척박하기 그지없는 가난한 집 몇 채뿐, 닭도 계란도 야채도 현지구입이 거의 불가능 했다. 짐을 운반하는 야크(Yak)들을 벗 삼아 천천히 걸으며,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야영준비와 창고정리를 마무리하고 요리도 대부분 대원이 직접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춥고 을씨년스러워 고소옷을 단단히 꺼내 입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루크라에서 에베레스트BC까지의 트레킹은 오히려 국내산행보다 훨씬 편하다. 또 히말라야의 다른 지역 트레킹에 비해 불편함이 전혀 없다. 워낙 많은 트레커(Trekker)가 각국에서 이곳을 찾아오기에 잘 닦여진 길은 걷기 편하고, 곳곳에 쉬어갈 찻집, 롯지 등이 즐비하여 추우면 따끈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기 편하다.

수시로 나타나는 레스토랑의 메뉴도 다양하고, 음식도 별 거부감 없이 우리 입맛에 맞으며, 고용된 쿡이 매 끼니마다 맛있는 한국음식을 차려준다.

잠자리는 포터가 운반해준 침낭 등을 꺼내 아늑한 호텔에서 잠을 잔다. 단 하루의 야영도 없는 아주 쾌적한(?) 트레킹이다.

때문에 산악인이 아니어도 건강한 신체면 남녀노소 누구나 트레킹이 가능하다. 가벼운 차림에 주변경치 감상하면서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고소적응만이 문제일 뿐이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해마다 계절구분 없이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인파가 에베레스트로 이어지고 있다. 에베레스트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 어느 때나 하루에 최소한 수십 개 이상의 트레킹 팀, 수백 명 이상의 트레커와 마주친다.

하지만 오늘날 에베레스트를 찾는 이들은 결코 그 옛날 그 긴 트레킹을 통해서 느꼈던 자연과 동화된 진정한 멋과 낭만 그리고 순수한 인생의 참 행복과 즐거움을 도저히 맛볼 수 없을 것이다.

 

 

 

6) 에베레스트 등반의 제도적인 변화

오늘날 에베레스트 등반은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변화했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수많은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신청하니, 네팔정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른 고산은 신청자가 점점 줄고 에베레스트만 늘어났다. 네팔정부 입장에서는 너무 에베레스트 쪽으로만 원정대가 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외국원정대와 트레킹 팀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는 각 산간지역 주민들이 골고루 먹고사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입산료를 올리는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입산료가 턱없이 비싸지면 원정팀이 다른 산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이 잘못됨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팀이 다투어 에베레스트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팀은 더 비싸지기 전에 빨리 세계 최고봉을 올라야겠다는 압박심리가 작용했다.

티베트정부는 네팔과 너무 차이가 나면 안 되기에 적당히 보조를 맞춰나갔다.

 

네팔정부는 재차 에베레스트 입산료를 올렸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으로. 그랬더니 웬걸! 더욱 몰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상업등반대가 생겨났다.

돈 있는 사람들은 각자 상업등반대에 신청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아주 편했다. 원정대 조직 등 이것저것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상업등반대는 예상을 뒤엎고 성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러한 상업등반대들이 경쟁적으로 성황리에 영업중인 유일한 고산이 바로 에베레스트다. 가격을 올리면 올릴수록 신청자는 늘어만 갔다.

 

이렇기 때문에 에베레스트의 30년 전과 지금은 제도(制度)적으로 몇 가지가 크게 변했다.

첫째, 30년 전의 에베레스트 등반은 봄에 한 팀, 가을에 한 팀, 1년에 2개 팀만 등반이 가능했다. 네팔정부가 봄, 가을로 나눠 한 팀씩만 입산허가를 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년 전에 미리 신청해야만 입산이 가능했다. 77년 가을에 등반한 한국대의 경우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워낙 많은 팀이 해마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신청하니 네팔정부는 사면초가. 1개봉 1개 팀의 기존원칙을 풀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무제한 받아준다. 심지어 원정대가 네팔에 도착한 후에 입산신청해도 그 비싼 입산료 챙기는 맛에 곧바로 입산허가를 내준다. 원정대는 해마다 늘어났다. 최근 들어, 특히 봄 시즌의 경우 네팔 쪽, 티베트 쪽 모두 수십 개 팀씩 에베레스트로만(2000년 56개 팀, 2001년 51개 팀, 2002년 44개 팀, 2003년 70개 팀, 2004년 63개 팀, 2005년 98개 팀, 2006년 116개 팀 등) 몰리고 있다.

 

둘째, 네팔정부에 내는 입산료가 하늘과 땅 차이다. 30년 전에도 에베레스트 입산료가 다른 산에 비해 가장 비쌌지만 인원제한 없이 한 팀이 100,000루피(Rs)였다. 현 환율로 계산하면 대략 140만 원 정도로, 당시 고작 US$1,200을 네팔관광성에 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산료는 팀당 US$70,000이다. 그것도 7명까지. 여기에 대원 1명 추가 당 US$10,000씩 더 내야한다. 만일 77에베레스트 원정대와 같이 대원이 총19명이라면 네팔정부에 지불하는 입산료만 2억 원에 가깝다는 계산이다. 비교하기가 어렵다.

 

셋째, 30년 전에는 한 계절에 한 팀만 등반하기 때문에 대원과 고소포터가 충분한 대규모 원정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폴 통과에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장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원수도, 식량과 장비도 넉넉해야만 했다. 참고로 73년 이태리 팀은 대원수만 64명(8명 등정), 일본 팀은 대원수 48명이었다(등정 실패). 75년 영국 크리스 보닝턴 팀은 대원 22명에 고소포터 41명, 아이스폴 셀파 29명, BC고용인 14명에 원정대가 직접 운반한 물량은 산소통 143개를 비롯하여 총 28.8톤이었다(5명 등정).

77년 한국대는 대원이 19명(기자 3명 포함)에 불과하고, 아이스폴 사다리 100개, 산소통 50개를 포함한 물량은 총 22.5톤에 달했으나 당시로는 비교적 소규모 원정대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각국에서 몰린 팀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우선 아이스폴 통과에 들어가는 장비와 인력이 필요 없고, 특이한 점은 돈만 내면 누구나 참가 가능한 상업등반대가 많다는 점이다. 현재 전체의 규모로 볼 때 거의 60~70%가 상업등반대로 이루어진다.

모두 똑 같은 기존루트를 통해 오르기 때문에 소규모 원정대, 심지어 1인 원정대도 충분히 가능하다. 돈만 있으면 만사OK다.

 

 

 

7) BC생활의 변화

30년 전 에베레스트BC에는 오직 한 팀, 우리 팀만 있었다. 우리 대원과 현지 고용인뿐이었다. 현지 고용인은 크게 나눠 아이스폴포터, 고소포터, BC고용인(쿡, 키친보이, 메일러너 등)을 말하고, 관광성에서 파견한 정부연락관이 1명 있었다. 한창 등반중일 때는 대부분 캠프로 올라가 BC는 그야말로 적막과 고요만이 감돌뿐이다.

BC에서 열(熱)과 따뜻한 온기(溫氣)를 구하기 위해선 가스램프아래 석유스토브와 포터들이 운반해온 땔나무가 전부였던 그 시절, 눈이 내릴 때면 하얀 전경에 외롭기 짝이 없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적막한 BC였다.

그 당시는 BC까지 찾아오는 트레커도 일주일에 한두 명 정도로 극히 드물었고, 낯선 외국인이 너무 반가워 BC에선 따뜻한 식사대접에 밤이 되면 편히 재워주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BC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1,000명이 훨씬 넘는 산악인들로 붐빈다. 등반 중 날씨가 한동안 나쁘면 대부분 위 캠프에서 철수하여 그 많은 인원이 동시에 BC에 거주한다. 여기에 매일 수백 명의 트레커와 그 몇 배의 로컬포터들이 야크 떼를 몰며 BC를 방문한다.

그러니 에베레스트BC야말로 멀리서 보면 큰 마을을 연상시킨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울긋불긋한 텐트들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밤의 야경도 환상적이다. 텐트마다 불이 켜있고 여기저기서 파티를 하며 노래와 춤의 향연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각국의 산악인들과 스스럼없이 사귈 기회도 많아 남녀 간의 예기치 못한 로맨스도 다반사다. 다른 고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에베레스트BC의 연료로는 포터블 석유발전기 외에 태양열발전기, 전기와 열을 동시에 공급하는 열병합발전기 등을 설치하여 밝은 전깃불 아래서 책을 읽으며, 전기장판, 전기담요, 전기난로를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 충분한 온수의 공급은 물론, 컴퓨터 등 각종 전자기기 사용이 가능하다. 이외에 위성전화, 영화, 음악, 술, 담배, 도박기기, 김치냉장고, 각종 음식 등....... 무엇이든 모자란듯하면 어김없이 아랫마을에서 운반해와 비싼 값에 판다. 셀파들에게는 하룻밤 여자도 판다.

또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안보이면 로부제, 페리체, 딩보체, 방보체 등 아랫마을로 내려가 호텔에서 푹 쉬다가 올라오는 대원수도 점차 늘고 있다.

 

반면에 팀 수가 많아 불편한 점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가 식수와 오물처리다. 각 팀마다 모레인(Moraine, 빙하 위 堆石지대)에 수많은 텐트를 치고, 화장실도 마련하는데, 바로 밑의 얼음과 눈 사이로 오물이 퍼져나가 불결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배설물, 쓰레기, 생활폐수가 뒤덮여 온갖 악취를 풍긴다. 때문에 BC에서는 누구나 두세 번 쯤 설사, 복통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제1캠프, 제2캠프, 제3캠프도 오가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화장실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식수용 눈과 얼음을 구하는 데 큰 곤욕을 치르곤 한다.

이 틈새를 노려 BC에는 간이병원이 생겼다. 한 번의 진찰료로만 현찰로 50달러씩 받는 폭리를 취하며 성황리에 개업하고 있다. 세탁소도 생기고, 쓰레기 청소회사도 생겼다.

 

티베트 쪽 에베레스트BC는 네팔 쪽에 비해 그 편리함을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하다는 말이다. BC까지 대형자동차가 바로바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도로사정도 매년 좋아지고 있다.

때문에 주문하는 즉시 신선한 배추, 김치, 각종 반찬, 소고기, 돼지고기, 계란, 술, 음료수 등은 물론 필름, 배터리, 의약품 등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바로바로 BC로 배달된다.

원정대원들을 보고 싶은 가족, 친구 등이 BC까지 찾아오는 데 자동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등산복장이 전혀 필요 없다. 넥타이에 신사복 입은 남자, 하이힐 신고 양장한 여인도 BC방문이 가능하다. 군에 가있는 아들 부대에 면회하듯 생각하면 된다.

BC 바로 아래에 비록 천막촌이지만 레스토랑, 호텔, 찻집, 바 등이 양쪽에 늘어서있어 원정대를 찾아오는 손님들과 하룻밤 머물기도 좋고, 대원들도 심심하면 삼삼오오 가볍게 내려와 한 잔씩 걸치고 게임하고 당구치는 등 실컷 놀다가 올라가곤 한다.

 

 

8) 등반의 변화

30년 전과 오늘날 에베레스트 등반의 변화는 무엇보다 셀파의 파워에 있다.

물론 과거에도 셀파의 힘이 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등반주체는 원정대였다. 당시 원정대는 앞에서 설명한바 그 규모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캠프 간의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해 셀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고소에서 셀파의 짐 나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파를 고용하지 않은 이른바 “알파인스타일”로 등반하려면 그것도 가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말이다.

 

현재 에베레스트 주인은 바로 셀파들이다. 외국인은 돈을 내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잠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격이고, 이를 무시한 등반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유독 에베레스트만 셀파의 도움에 의존해야 등반이 가능토록 되어있다. 가히 절대적이다.

 

우선 첫 난관인 아이스폴 지역을 보자.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매 순간 움직이며, 어느 순간 갑자기 무너지기도 하는 이 위험천만한 아이스폴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선, 또 수시로 길을 보수하기 위해선 원정대마다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또한 매년 이곳의 변화추이를 잘 감지하여 안전하게 길을 내고, 수시로 즉각 보수(補修)해주는 전문 셀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점차 원정대 수가 많아지자 각 원정대마다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에 자연스럽게 셀파들의 생각도 바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선 셀파들이 자체적으로 길을 만들고 계속 보수하면서, 그 비용은 원정대의 통과료로 충당하자는 것이다. 이윤을 남기는 일종의 기업이 생긴 것이다. 이미 20년 가까이 되었다.

 

원정대 수가 많아질수록 장사가 잘 되는 독점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반면에 원정대 입장에선 이 아이스폴 통과료가 제아무리 비싸더라도 직접 따로 길을 내는 것보단 경비가 덜 들고, 시간과 힘도 절약되며, 덜 위험하며, 중간에 점검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이다. 서로 합리적이었다.

작금에 들어선 원정대가 아무리 빨리 등반하고 싶어도 셀파들이 아이스폴에 길을 다 뚫을 때까지 BC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

각 캠프구간도 마찬가지다. 셀파들은 서로 단합하여 각 구간마다 길을 만들고 통과비를 요구한다. 고소캠프로 오를수록, 또 정상에 오르면 그때그때 셀파에게 지불해야할 비용을 미리 정해놓았다. 이렇게 첫 관문인 아이스폴 통과부터 각 캠프를 경유하여 정상까지 이들의 도움 없이는 등반이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변해버렸다. 등반도중에 이들을 무시하고 새치기하듯 추월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

셀파는 모든 팀이 원활히 오르게끔 각 캠프구간을 비롯하여 정상 바로 아래까지 고정로프를 견실히 설치해 놓는다. 물론 모든 게 다 돈으로 계산된다. 팀과 대원의 필요한 짐도 미리 옮겨준다.

돈벌이가 주목적인 셀파 입장에서는 가급적 많은 팀이, 많은 대원이 정상에 올라야 더 돈을 받으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여기에 원정대에 고용된 고소포터들이 대원을 도우며 함께 등정한다. 심지어 산소 사용하는 대원 바로 옆에서 산소통을 대신 메주기도 한다. 그들에겐 오직 돈이 목적이고, 에베레스트야말로 이른바 황금어장인 셈이다.

 

이렇듯 숙달된 셀파들이 대원들의 앞뒤에서 원만한 등산과 하산을 도와주니, 대원들은 오로지 이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고소순응만 하면 된다. 또 오직 자신만의 하루산행에 필요한 가벼운 배낭에 가벼운 옷차림이면 족하다.

각국에서 몰린 그 수많은 팀의 모든 대원이 다 똑같다. 참고로 금년 봄까지 에베레스트의 총 등정자 숫자는 3,660여 명이고, 이중 네팔사람이 그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히말라야의 고산처럼 대원들이 직접 루트파인딩(Route Finding)을 하고, 루트를 개척하고,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야영지를 정하고, 짐을 직접 나르는 등 원정대의 자주적 팀워크등반은 에베레스트에서만은 이제 머나먼 옛 이야기가 되었다.

 

 

 

9) 알피니즘의 변화

작금의 에베레스트등반은 오직 정상이 목적이니만큼 머메리즘(Mummerism - 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이나 이른바 순수 알피니즘(Alpinism)은 이미 그 의미가 없어졌다. 진정한 히말라야 등반은 고도(高度)보다 태도(attitude more than altitude)가 더 중요하다지만, 에베레스트만은 예외가 되었다.

이 산을 오르겠다는 사람은 오직 세계 최고봉에 서겠다는 일념뿐이므로 이 산에서만큼은 신루트 개척의 의미가 점점 빛을 잃고 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면, 또 진정한 등로주의 등반을 하려면 히말라야에 훌륭한 산이 너무 많은데 굳이 그 비싼 입산료 내면서 에베레스트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에베레스트를 찾은 그 수많은 원정대가 북쪽이건 남쪽이건 대부분(약 98%)이 노멀루트를 택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2001년부터 금년 봄까지의 에베레스트원정대 약 500팀 중에서 불과 10여 개 팀만이 다른 루트로 도전했으며, 이중 2003년에 북동릿지(NE Ridge)로 한 팀, 2004년에 북면(N Face)으로 두 팀만이 등정에 성공했다.

반면에 노멀루트는 특히 봄(Pre Monsoon)에 성공률이 높아 2000년도에 들어와 약 77%가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의 경우, 25개 팀이 등반하여 24개 팀이 성공했다. 때문에 가급적 봄에 엄청 많이 몰리고 있다. 가을(Post Monsoon)엔 과거보다 오히려 등반하는 팀이 줄었다. 한국은 4개 팀이 등반하여 2개 팀이 성공했다.

 

순수 알피니즘을 무색하게 만드는 데엔 정보통신도 크게 일조하고 있다. 에베레스트BC에는 각국 특히 선진국의 기상예보가 위성통신과 인터넷으로 매일 속속 도착된다. 주변의 기상과 날씨가 나쁠 것이라는 예보가 있으면 이 산에서만은 움직이려는 팀이 하나도 없다. 변화무쌍한 자연과 과감히 맞부딪쳐 극복해나가겠다는 투철한 도전의지가 없어진 것이다.

 

또 요즈음은 제3캠프까지 올라갔다오면 고소순응이 되었다고 본다. 그 이후론 BC에서 느긋이 웅기조식하며 대기하다가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고가 있으면 각 캠프를 거쳐 정상까지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셀파의 도움을 받아 오르면 된다.

웬만하면 대부분 제3캠프부터 산소를 사용한다. 하루에 100명 이상 정상에 서는 것은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나라별로, 팀별로 움직인다는 것이 에베레스트에선 이제 불가능해졌다. 아울러 알피니즘은 고사하고 “알파인스타일”이란 등반형태도 에베레스트에선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에베레스트는 지리학적으론 세계 최고봉임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8,000m 고산에 들어가는 관문으로 체험과 훈련의 대상으로 비하되었다. 알피니스트의 눈에는 어쩌면 에베레스트 노멀루트야말로 8,000m 14개봉보다 낮은 7,000m급의 산으로 보일지 모른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기술 등 보조수단이 큰 산을 작게 만든다고 했는데, 에베레스트야말로 그렇다. 특히 셀파들의 파워와 몰려오는 인파와 충분한 산소사용이 이 산을 아주 낮게 만들고 있다.

 

등반하는 사람도 이제는 전문산악인 뿐 아니라, 전혀 등반경험이 없는 일반인들도 암벽, 빙벽, 설벽 등 전문등반의 기초기술을 어느 정도만 익히면 셀파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세계 최고봉 등정이 가능하다. 고소적응이 잘되고 정신력과 체력만 우수하다면.......

 

여기에 잠시 이색 등정기록을 살펴보자. 1998년엔 한쪽 다리가 없는 장애자가 등정했고, 2001년엔 16살의 청소년이 등정했고, 장님도 셀파의 도움으로 정상에 올랐다. 2003년엔 삼형제가 나란히 정상에 섰고, 2004년엔 펨바 도루찌 셀파가 BC에서 출발해 정상까지 8시간 10분이라는 경이적인 빠른 속도기록을 세웠다. 또 2005년엔 정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이색 커플이 탄생했으며, 금년 봄 아삐 셀파는 총 17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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