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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

climbing club - 청악산우회

by 안그럴것같은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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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 CLUB

청악산우회

 

글 이민호 객원기자

 

‘곳에 따라 토왕보다 어려운 피치를 가지고 있다 해서, 몇 미터의 직벽만 넘고 나면 경사가 70도 정도로 누워지는 구곡폭을 한두 번 등반했다고 해서, 토왕을 함부로 넘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맑은뫼 13호』에서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40대의 산우회원 원종민(코오롱등산학교 강사)씨가 달리는 차 안에서 선배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접선(?) 장소를 정한다. 지금 운전하는 원종민씨도 산악회에서 고참에 속하건만 50대 선배를 픽업하기 위해 변두리로 차를 몬다. 창립회원인 선배는 30대 후배보다 40대 후배가 조금은 더 편하신가보다.

서울 외곽에서 청악산우회(淸岳山友會 ․ 회장 윤용문)의 창립 멤버 장기활씨가 합류했다. 덕분에 60~70년대 올드팝에 취해 졸고 있던 기자도 잠에서 깼다. 장기활 선배는 예전에 몇 번 통화한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나 뵙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만남을 가져온 듯 편안함이 느껴진다. 기분이 좋다. 개인적으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던 차에, 취재산행을 핑계로 산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20년 전 청악인들의 목표 토왕성

 

전설처럼 내려오는 청악의 스토리가 궁금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듯 들려주는 선배들의 이야기 속으로 긴 시간의 여행을 떠난다.

청악산우회원들의 토왕성에 대한 태도는 사뭇 숭배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1985년 12월 말부터 청악산우회는 토왕성 빙폭 등반을 목표로 31일간 구곡폭포에 캠프를 설치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을 마친 이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누구라도 구곡에서 한 달 동안 이렇게 살면 토왕폭을 등반하는 것은 문제없다”라고. 그렇다. 맞는 말이었다. 그 당시 훈련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전 회원 등반 회수 187회, 50회 이상 등반자 2명. 당시 열악한 장비와 등반력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대기록들이었다. 구곡 빙폭 길이를 단순히 50미터로 계산한다고 치자. 총 등반거리가 9350미터에 이르는 셈이다. 그러니 처음 2인 1조로 훈련할 때 3시간씩이나 소요되던 등반시간은 한 달이 지난 후 한 시간이내로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곡 빙폭 훈련을 마친 후 이 정도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준비된 특공대원들(?)은 토왕성 빙폭으로 향했다. 1977년 도전자의 발길을 처음으로 허용한 토왕은 198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단독등반이 이루어질 만큼 거센 도전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등반할 수 있는 빙폭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악산우회는 준비된 도전자들이었다. 그들은 토왕성 빙폭 상, 하단을 2인 1조 나누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전장 300여 미터의 국내 최장폭 토왕을 등반해내기에 이른다.

계획에서부터 등반, 그리고 보고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한 후, 당시 산우회장이었던 장기활씨는 안나푸르나 초등 후 모리스 엘조그 대장이 말한 것처럼 이런 선언을 했다.

 

“청악에게는 또 다른 토왕폭이 있다. 우리 모두의 뜻을 모아 반드시 또 다른 토왕폭을 찾겠다.”

당시 그들의 높은 등반 욕구와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다. 청악산우회의 등반 경력을 잠시 살펴보자. 설악산의 마등령과 귀때기청봉 직선등반, 화채봉 마등령 직선등반, 아이스 바일의 꽈배기식 손목걸이 개발, 소승폭 초등, 소토왕폭 초등, 대승폭 단독등반, 구곡폭포 여성 최초 선등, 캐나다 록키지역 대빙폭 등반, 설악산 소토왕골 암장 개척, 도봉산 선인봉 청악길(5.11a/b) 개척, 설악산 토왕폭 및 장군봉 하강루트 개척, 회원 다수의 타일랜드 프라낭 5.13급 등반, 살라테월 단독등반, 그리고 제4회 대한민국산악상 개척등반상 수상 등등, 이들의 선구자적 활약들은 한국 등반문화 발전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5년의 전통을 잇는 힘

 

청악의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악산우회는 전회원의 고른 등반능력을 시험하는 등반을 기획한다. 1990년 2월, 청악은 다른 산악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고(?)를 쳤다. 이른바 토왕폭 5개조 10명 동시 등반이 그것이다. 이는 산우회 회원 개개인의 등반 능력을 조직적으로 육성시켜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각 단위 산악회가 이룩한 등반들이 대개 뛰어난 한두 명의 클라이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라면 청악은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 토왕폭을 프리솔로로 다섯 명이 등반할 수 있는 산악회가 있을지는 몰라도, 선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 있고 그 파트너로 후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이벤트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대규모 등반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일로 기록될 것이다.

청악산우회에도 간판스타는 있다. 그의 이름은 김운회.

“빙폭의 난이도는 해에 따라, 날씨에 따라 변합니다. 따라서 빙벽등반은 등반자의 등반능력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 등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할 뿐입니다.”

 

1990년 2월에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설악산 대승 빙폭을 단독등반 했던 김운회씨의 말이다. 김씨는 등반할 때 허밍버드 햄머를 사용해 등반을 무사히 마쳤지만, 그 당시 산우회에서 단독등반을 금기시했기에 자신의 등반을 선배들에게 알리지 않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청악의 얼굴 원종민씨는 예의 꼼꼼한 성격으로 코오롱등산학교 교무를 맡고 있다. 그는 ‘암벽등반의 세계’, 등산학교 표준교재인 ‘등산’의 집필에 참여한 학구파 클라이머다.

 

전양준씨는 작년 여름 파키스탄에 위치한 트랑고타워(6239m)에 신루트를 개척하고, 2001년 중국 하얼빈 국제빙벽등반대회에서는 2등을 한 실력파 클라이머다. 타고난 체력이 장점이다. 1997년 그는 그 힘을 바탕으로 타일랜드 프라낭에서 5.13급 루트들을 등반해냈으며, 최근에는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와 대한산악연맹 빙벽대회 루트세터로 활약하고 있다. 여러 활동을 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았다.

 

“80년대 초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이 점장이었던 산우회 회원에게 발탁되어 회원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활동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회원은 창립기념 산행이 친형 결혼식과 겹치자 불참하고 산에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회원의 말이 더 걸작이더군요. 글쎄 형은 매일 볼 수 있다나요. 그뿐이 아닙니다. 한 회원이 프라낭에서 등반하던 사진이 클라이밍지에 나왔는데, 그 사진을 보고 반한 유럽 여인이 찾아 온 것입니다.”

 

 

맑은뫼에 비친 빙벽 달인들의 자화상

 

1971년 창립되어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매주 산행을 하며 정통 알피니즘의 추구하는 청악산우회의 가장 큰 강점은 선후배간의 팀웍을 실현해 나가며, 창립 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꾸준한 활동에 있다.

청악산우회는 ‘맑은 뫼’라는 회지를 냈다. 맑은 뫼는 단순한 회지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초기 ‘맑은 뫼’는 단순히 장기산행 보고와 등반기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곡 빙폭에서의 훈련과 토왕 빙폭 등반을 마친 후,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수직빙벽등반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때 ‘맑은 뫼’는 한국적 빙벽 특성에 맞는 장비에 대해 평가, 각 장비별 장단점과 사용법, 등반자세와 확보기술, 훈련방법 등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 내용들은 외국 서적을 참고하기보다는 회원들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내용들이었다. 500부를 발간해 각 단위 산악회와 대학산악부에 발송하였다. 입소문을 통해 빙벽등반의 교과서로 사용 되면서 주변의 요청이 쇄도(?)하자 200부를 추가 제작했다. 어느 산악회에서는 이 회지를 교재로 삼아 민박집에서 합숙하며 등반을 했는데, 하도 책을 많이 봐서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학창시절 필자 또한 교실 뒷자리에 앉아 수업과는 상관없는 ‘맑은 뫼’를 읽으며 토왕을 꿈꾸었었다. 

 

등반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등반을 글로 정리하는 것 또한 등반 이상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청악은 빙벽을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빙벽등반의 길잡이 ‘맑은 뫼’를 통해 끝없는 상상과 도전을 클라이머들에게 제시했다. 에디슨이 위대한 것은 전구를 발명하여 자신의 집을 밝힌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밝혔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 한 놈쯤 들어올 때가 됐는데…”하며 후배들의 등반을 지켜보던 윤용문 회장이 한마디 한다. 신규 매니아가 필요한 시기다. 그래도 윤용문 회장은 청악산우회 회원들이 ‘산에 미친놈’이 되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고 한다. 산이 우선이 되어선 안 되며 생활과 가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은 자기만족이므로 생활의 바탕을 튼튼히 한 후 그 다음이 산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산에 빠져 볼까 말까 항상 고민 중인 필자에게도 산 선배의 진심어린 충고가 가슴에 와 닿았다.

 

청악산우회와 함께 한 하루가 지나고 땅거미가 내리자 여기저기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후배들이 등반을 마치자 선배들이 나서서 장비 정리를 돕는다. 로프와 등반에 사용했던 스크루와 퀵드로 그리고 머물렀던 자리 정리에 이르기까지 후배들의 마지막을 챙기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청악의 힘이 아닐까.

 

월간 클라이머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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