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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더불어 숲 (리뷰)

by 안그럴것같은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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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 신영복 교수가 보내온 삶과 사색의 엽서

라고 책 표지에 설명되어 있다.

 

다시 선생님의 책을 집었다.

 

먼저, 제목.

‘더불어 숲’

이 책을 읽었다면 책 제목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선생님의 생각이 책 제목 저 네 글자에 다 담겨 있다.

책을 소개하자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쓰신 여행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여행기에 그치지 않고

여행 속에 선생님의 생각을 느낄 수 있다.

 

비교할 만한 책이라면

<문명의 배꼽, 그리스>라는 박경철의 책이 있겠다.

내가 여행기를 잘 읽지 않아서.

이런 책을 읽어봐야 <더불어 숲>이 훌륭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홈페이지도 한 번 둘러보자.

아직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어 반갑다.


 

책 속으로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화(和)의 원리입니다. 이에 반하여 동(同)의 논리는 병합하여 지배하려는 획일화의 논리입니다. 세계화는 바로 이러한 동의 논리였습니다. 패권적 지배이며 일방주의적 강제와 오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강제와 오만에 대하여 다투어 영합하고 있는 모방과 굴종의 세계화였습니다. (12쪽)

 

-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아우르는 머릿글이다.

 

 

 

 

 

 

 

여행은 돌아옴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귀중한 공부였습니다. (12~13쪽)

 

- 여행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보자. 정답이 정해진 질문은 아니니까 어떤 답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만나는 과정” - 선생님이 내리신 정의와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 마라톤 평원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우리는 이겼다’는 외침과 ‘나는 이겼다’는 외침 사이에는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우리들로 하여금 쓸쓸한 감상에 젖게 하는 까닭은 아마 아직도 ‘내’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 되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49쪽)

 

 

- 중국의 만리장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오늘날도 엄청난 공세가 거침없이 밀어닥치기는 만리장성 당시와 마찬가지입니다. 세계화 논리를 앞세우고 더욱 거세게 쇄도하는 외풍과 외압이 이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들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울타리마저 스스로 헐어야 하는 난감한 현실입니다.

이처럼 난감한 현실은 만리장성의 장대한 모습을 무척이나 부럽게 합니다. 작은 성 하나 쌓지도 않은 우리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집의 작은 담장을 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을을 지키는 성이 없고 나라를 방어할 성벽이 없다면 제 집의 담장인들 온전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10-111쪽)

 

 

 

-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다름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쉰들러리스트는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다음의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한동안 망설이다 덧붙입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카지나예슈 보야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영화는 사실과 다르다는것이었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으로부터 범랑 냄비 생산 공장인 레코르드를 불하받은 쉰들러가 이 공장에 유대인들을 고용함으로써 유대인 수천 명을 아우슈비츠에서 구해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용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는 그의 ‘장사’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125쪽)

 

 

 

 

- 미국 서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신대륙의 꿈은 더욱 명백합니다.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었음은 물론입니다. 더구나 ‘발견’이란 가당치도 않은 단어입니다. 신대륙의 꿈은 땅과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처지를 완벽하게 사상하지 않는 한 결코 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32쪽)

 

 

 

- 마야 - 아즈텍의 태양력에 의하면 태양의 종말이 존재하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은 이 태양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려는 그들의 간절한 기원에서 비롯된 의식이라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태양을 연장하기 위해서 행했던 인신 공양은 우매하고 잔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우매함과 잔혹함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혹시라도 자기의 세계를 연장하기 위하여 서슴지 않고 바치는 제물은 없는지 돌이켜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인을 고루 비추는 태양이 아니라 사사로운 태양을 연장하기 위한 희생이라면,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중략)

몽테뉴 역시 그의 <수상록>에서 식인종 사회의 식인 풍습도 살아있는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을 펼치며 종교 전쟁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을 비판하였습니다. 유럽 지성사에서 자기만이 올바르다는 폐쇄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신대륙의 삶과 문화였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럽이 신대륙에 상륙한 이후에 보여준 도도한 역사는 이러한 지성과 반성을 동시에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과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야성과 독선은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243~244쪽)

 

 

 

-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설령 피의 제전이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인신 공양을 산양으로 바꾸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파괴의 이유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괴 그 자체가 훨씬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악이 흔히 패배한 작은 악을 제물로 삼고 있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타국의 인권 문제에 관여하는 방식은 전쟁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쟁 수단이 평화와 휴머니즘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파괴의 양이 아니라 그것이 파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파괴, 그리고 잔혹함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잔혹함에 대해서는 자른 이름으로 이를 단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51쪽)

 

 

 

 

 

- 리버풀에서는 비틀스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당신은 비틀스가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결별로 설명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결별은 비틀스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강압, 즉 상업성과 정치성이라는 외압이 비틀스 그룹 속으로 내와한 것이며 결국 비틀스는 이 두 외압의 합작으로 종언을 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와 외압 이전에 비틀스의 자양이 되었던 생산 현장이 황무지처럼 매말라 있다는 사실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손잡고(Hold hand) 노래할 청중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더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리버풀이 산업혁명의 고장이었다는 사살, 그리고 비틀스는 이 고장의 동력이었던 노동 계급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294~295쪽)

 

 

 

-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일상적으로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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