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작가가 10명이다. 각각의 전문 분야가 다르고 따라서 주제의 포인트도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리영희라는 하나의 주제 안에서 어우른다. 분명히 서로 다른 주제를 말하는데 결론적으로는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10명의 저자 중에는 은수미에게 눈길이 갔다. 거의 10년 전에 나온 책이라 은수미의 소개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은 시장님이시다.
리영희라는 이름의 교양,
우리시대 교양의 기초
뒷면 카피 글이다. 멋지다.
이 책은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이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홍세화의 서문 중에서)
그런 책이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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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검사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중국에 대해 리교수가 쓴 글이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인하고 해외 공산주의를 찬양했다고 주장했다. 명백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리교수가 답했다. "가난하지만 먹을 것은 먹고,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입을 것도 입고 있습니다. 병이 나면 치료도 받고 있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묘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편견과 인식 착오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 쓴 글이 고무 찬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공산주의 사회의 진실을 이데올로기적 고정관념과 30년 전의 냉전의식을 토대로 해서 신앙처럼 믿고 있는 인식 착오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18쪽)
"사람들의 잠을 깨워야 하는가, 그 깨어남이 고통스러울 때조차."리영희가 여러번 자문했던 화두, 그것은 노신이 <외침>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가령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수도 없는 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잖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거야.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걸세.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웠다고 하세. 그러면 불행한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 줄 터인데, 그럼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라도 깨어난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리영희는 이 글을 읽다가 "눈을 뜨고 정신이 번쩍 드는"체험을 했다고 했다. 노신의 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장제스 총통 치하의 중국 사회를 풍자한 글"이었는데, 그 상황이 박정희 치하의 자신에게 곧바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70~80년대 선배들에게 그가 그랬듯이, 노신은 그에게 하나의 지진이었다. 리영희는 <자유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보고, 소리를 지르고, 철로 된 방의 벽을 두들기다 주먹에서 피가 흐르면 온몸으로 부딛혔다. 온몸에서 피가 흘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내가 있는 곳은 형무소라는 철로 된 방이었다." 간혹 그가 깨운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철로 된 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27쪽)
1960년대 들어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고 한국이 참전하게 되었을 때 지배하던 담론은 '보은론', 즉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어 자유를 찾았으니 우리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야 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리영희는 여기서 매우 명백한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였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의 은혜로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난 영국은 왜 단 6명의 의장대만 보냈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미관계를 설명하는 '혈맹론',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했던 '보은론'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62쪽)
- 영국이 6명의 의장대만 베트남에 보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당시는 블레어 총리의 시대가 아니었으니.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들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것은 본래 예수처럼 살라고 '부름받은 이들의 모임'이지만, 현실에서는 단순히 건물이나 제도와 동일시되다시피 한다. 교회의 주체이어야 할 사람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벽돌이나 제도에 종속된다. 다른 종교를 '우상'으로 몰아붙이며, 자기 종교만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88쪽)
절을 하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어떤 형상 앞에서 절을 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을 인간적인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를 의미한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행위의 수단 또는 근거로 하느님을 들먹이는 행태가 하느님을 우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행위, 즉 우상숭배인 것이다. 보통때는 하늘에 모셔두고 무관심해하다가 아쉬울때 하느님, 예수님 하며 욕구충족을 위해 찾는 그런 수준이라면, 하느님을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이니,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90쪽)
말하기의 핵심은 유려한 발음에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발음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강세(악센트)에 신경을 쓰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어색한 영어로 외국인들이 말해도 '원어민'들이 알다듣는 이유는 강세를 지켜 발음하기 때문이다.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강세가 틀리면 알아듣지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전달하려는 내용이다. 500단어의 유창한 발음에 원어민들은 별로 감동받지 않는다. 내 경험을 돌이켜 봐도 그렇다. 미국의 영문과 대학원 수업에서 교수나 미국인 학생들이 나 같은 외국 학생들의 발언에 귀를 기울일 때는 원어민 같은 발음으로 알맹이 없는 내용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발음이 조금 어눌해도, 유려하지 못한 문장을 구사해도, 말하려는 내용이 신선하고 사고를 자극하면 그들은 귀기울여 들었다. 알맹이 없는 내용을 유창한 발음으로 포장하는 사람을 보통 사기꾼 같다고 말한다. (118쪽)
- 27년 전에 친척 집에 갔었다. 그 곳에는 당숙의 홍콩 친구가 있었다. 당숙은 나를 대학 후레시맨이라 소개했다. 그 홍콩 친구는 내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악센트 없는 발음으로 '인더스트리얼 프시촐로기'라고 대답했다. 홍콩 친구는 못알아들었다. 당숙이 다시 '인더스트리얼 프시촐로기'(악센트를 넣어서)라고 하자, 그 홍콩 친구는 알아들었다. 졸라 쪽팔렸다. 당숙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중이었다.
한 주간지에 보도된 기사에서 어느 대학 학장이 본심을 드러낸다. "같은 수업이라도 전 강의를 영어로 하므로 그 대학의 글로벌 순위가 높아지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말씀. 영어 강의는 강의의 내실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글로벌 순위'를 올리기 위한 광고 수단이다. 오히려 학생들이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는다. "재학생 김정훈(20.가명)씨는 '같은 수업이라도 준비되지 않은 교수가 영어로 강의를 하면 수업의 깊이도 얕고 진도도 더 느리다'며 '우리는 한국어를 써도 수준 높은 강의를 원한다'고 말했다." 언어보다 수업의 질적 수준이 국제화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19쪽)
- 모 대학의 글로벌 경영학과를 말하는 듯하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당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들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리영희에게는 영어 공부의 '정신'이 있었다. 영어 공부의 목적과 방법을 분명히 구분하는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없으면 영어는 입신양명의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영어 사대주의의 추악한 표현이 된다. '정신'은 잃어버린 채 유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한국인은 파농Franz Fanon의 표현을 빌리면, '검은 피, 하얀 가면'의 정신적 식민지인이 된다. 우리가 지금 리영희에게 배워야 할 것은 그런 정신이다.(124쪽)
- 남조선의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외국어 공부를 필수로 해야 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하냐고? 그건 아는 사람을 통해 물어보자. 그런데, 왜 하지?
1948년부터 2007년 6월 현재까지 학술진흥재단에서 해외 박사 학위논문을 신고한 이는 2만 4691명이고 이 가운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만 3782명으로 55.8%다. 2007년 6월 현재 서울 소재 아홉개 대학(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의 정치외교학과, 경제학과 사회학과 교수 365명의 박사 학위자 가운데 미국 박사는 83.8%였고, 한국 박사는 6.6%였다. (141쪽)
- 음, 사실 이 부분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빵 터졌던 부분이다. 학문의 미국 종속주의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파트를 쓰신 분을 검색해보니 고려대 대학원, UCLA 라고 나와있다. 학부에 대한 부분은 안나와있었다. 그런데... 누가 한국의 대학을 이야기 할 때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의 순서로 이야기 하나.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이게 순서 아닌가. 이 글 쓰신 분 검색해봐도 학부가 안나오는데, 경희대 졸업하셨나. 신선했음.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중 무엇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 중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얼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먹고 살 걱정이 아니라 '남보다' 못 먹고 못살 걱정이 극에 달한 우리는 오히려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먹이 한 줌을 위해서, 얼마든지 자유를 반납할 용의가 간절하다. (225쪽)
- 나는 이미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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