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건 개인의 선호이므로 당위성이 개입할 부분이 아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다른 일정과 겹치지 않고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는 날 야구를 하면 꼭 야구를 본다.
물론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만.
그러나 축구는 좋아하는 팀 조차 없다.
월드컵이 열리는 4년 주기로 애국자가 될 뿐이다.
그나마 해외경기가 시간이 잘 맞지 않으면 알람을 맞춰놓지도 않는다.
‘눈 뜨면 보지 뭐’ 이런 식이다.
당연히 EPL은 보지도 않는다.
각자가 좋아하는 각각의 스포츠가 있듯이
누구나 좋아하는 책의 유형이 있다.
도서관 분류에 따르면 사회과학 책을 선호하고, 역사, 과학, 철학(심리학)책을 본다.
문학은 그 다음 선호다.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숨겨진
구원의 상징과 생존을 향한 뜨거운 갈망”
간만에 소설을 집어 들었다.
이유는? 정유정을 믿어서이다.
과거에 좋은 글을 쓰셨던 여러 훌륭한 소설가분들에 비하면
정유정은 조금 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겠다.
정유정의 글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치밀하고 압도적인 서사,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문장,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
나는 집에서 책을 잘 보지 않는다.
안본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로 집 밖에서 본다는 얘기다.
밖에서 읽던 책이 조금 남았는데,
결말이 궁금해서 결국 집에서 끝까지 읽어버렸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왕창 있습니다.
그렇다고 줄거리를 쓰지는 않지만,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안보시길 권장합니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구제역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라고 말한다.
내용 중에는 신종플루와 에볼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의 출판년도는 2013년이다.
아마도 작가가 이 상상을 최근에 했다면 코로나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감염학에 관한 책보다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작가의 말. 494쪽)
도서 <팩트풀니스>에서 의사인 저자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어느 도시에 전염병으로 추정되는 병이 발생한다. 보건 담당자는 백인인 이 의사를 불러 봉쇄 해야하냐고 묻는다. 저자는 동의한다. 얼마 후 지나던 중 강에 빠져 익사한 가족의 시체를 만난다. 사연을 들으니 도로가 봉쇄되어 나룻배로 도시로 가던 중 모두 빠져 죽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판단이 이 가족의 죽음을 불러온 것을 알고는 깨우친다. 병을 막는 것이 봉쇄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과 현실에서는 ‘봉쇄카드’를 꺼내들었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아이는 절대 죽지 않는다.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
어벤저스에서 아이언맨, 로다주 출연료가 너무 비싸서 죽게 되는 건 예외.
그래서 그 시절 우리는 주윤발에게 열광했을지도 모른다.
윤발형님이 가던 배를 돌려 발로 운전하며 총을 난사하며 나타났을 때
나쁜 놈들은 다 죽을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총에 총알이 몇 발 들어 있는 건 중요하지 않다.
악당은 벚꽃잎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설마 이 형님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설이 그랬다.
‘설마 이 사람은 죽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안심하지 말자.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자꾸 얘기가 홍콩으로 샌다.
첩혈쌍웅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총격전이 끝나고 죽어가는 주윤발과 여주인공 제니가 마지막 숨을 쉬며 서로를 찾아가는 장면.
이 소설에 비슷한 부분이 나오는데.
첩혈쌍웅을 소설로 썼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소설에서는 남녀가 아니라 암수였다.
정유정의 적나라한 표현을 보자.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잽싸게 정문으로 들어선 뒤 문을 닫고 빗장을 채웠다. 현관을 향해 걷는 동안, 인간과 동물, 근친상간의 성적 친밀성 및 암수의 성기에 대한 직유를 총망라한 대서사시적 욕설이 휘몰아쳤다. 현관에 다다를 무렵엔 문대성의 차가 날아가는 웽, 소리가 울렸다. (399쪽)
‘여자가 졸라 욕을 했더니 남자가 갔다’ 이런 내용이다. 이거 보고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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