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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서평)

by 안그럴것같은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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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던 책이 보이지 않아 맹목적으로 서가를 돌아다니다 이 책을 발견했다.

제목이 나를 당겼다.

그렇다. 안락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이 책 170페이지가 조금 넘는 아주 얇은 책으로 빨리 읽을 수 있다.

큰 맘 먹고 다 읽을 수 있을 까 생각하며 도전해야 하는 책이 아니니 안 읽었다면 찾아보자.

저자는 서문에서 안락사에 초점을 두기 전에 죽음 자체도 대상화해야 한다고 한다. 모든 죽음은 삶과 연결되기에. 글을 쓰게 되는 배경이 좋다.

 

책에는 주로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저자.

다른 한 사람은 저자를 본인의 안락사에 초대하신 분.

저자의 책을 좋아해서 그러신 듯 하다. 이하는 그냥 ‘독자’로 칭하겠다.

굳이 ‘망자’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두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은 독자가 안락사를 선택하고 저자는 그 4박 5일의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독자는 이메일로 저자에게 본인의 안락사 과정에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저자는 수락하게 된다. 독자는 한국인이며 호주에 살고 있었다. 이 부분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는 않지만 안락사를 선택한 독자는 저자의 책을 아주 좋게 읽은 듯 하다.

뒷부분은 죽음에 관한 저자의 수필이 이어진다.

 

 

 

 

서문에서는 안락사와 조력사에 관한 개념부터 정의한다.

안락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적극적 안락사로 나뉘는데

소극적 안락사는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는 걸 말하고

적극적 안락사는 말기 암 환자에게 독극물을 투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걸 말한다.

조력사는 외부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치사량의 약물을 마시거나 주사를 놓는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몇몇 포털과 사전을 검색해봤는데 ‘조력사’에 관해서는 어느 곳도 설명이 없었다. 나 또한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저자도 책 제목을 ‘안락사’라고 썼는데, 실제로는 ‘조력사’였다.

소극적 안락사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도 시행하고 있으며,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이미 신청했다.

내가 벽에 똥칠하거든 그냥 죽게 냅두라는 소리다.

 

저자는 이 특별한 경험을 언론에 발표한 듯 하다.

‘마치는 글’에서는 스위스 조력사 단체에 회원으로 등록한 한국인이 100여 명이라고 했다.

저자의 글 덕분에 회원이 늘은 듯 하다.

 

독자의 사망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한다.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책이 출간된 건 2022년 8월이고

독자가 사망한 건 2021년 8월이다.

코로나가 한창으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기이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위스로 출국하기 위해 코로나 검사를 받고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다시 오기 위해 미리 코로나 검사를 받는데, 검사비를 당일에 받지 않고 나중에 한국으로 청구하겠다고 했단다. 이 사람들을 뭘 믿고.

외부에서 호텔로 택시로 돌아오면서 기사에게 내일 공항으로 가야하니 와달라고 하자 택시요금은 내일 한꺼번에 받겠다며 그냥 갔다고 한다. 뭘 믿고. 다른 택시 불러서 공항 가면 어쩌려고. 스위스가 이렇게 신뢰가 높은 사회였던가. 스위스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은 적도 없고 택시를 타 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다. 나는 늘 대중교통과 렌트카만 이용해봐서.

 

독자는 본인이 죽기 전 저자에게 <상처받지 않는 영혼>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두 책을 저자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저자에게 선물한 책이다. 이 책도 당연히 리스트에 올려본다.

 

책 내용 중엔 소설 <큰 바위 얼굴>이 나온다. 저자는 너새니얼 호손이라고 나온다. 검색해보니 실제 그렇게 나온다. 내가 교과서에서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나다니엘 호돈(호손)이었던 것 같은데.

 

 

 

 

글 속에서 저자는 1963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스위스에서 독자의 죽음을 본 후 4개월 후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책 후반부에 저자의 종교에 대한 생각도 나오기는 하는데, 조금 이해는 안된다. 여기서 또 저자의 나이를 쓴 이유는 저자가 다른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 개종한 건 아닌 걸로 보인다. 종교를 갖지 않고 60년 가까이 살다가 갑작스레 종교를 갖게 된다? 이 부분은 정말 공감되기 힘들었다.

 

내 생명의 결정권이 내게 있다는 생각이 인본주의라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며 따라서 살고 죽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믿음은 신본주의적이니 두 입장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10~11쪽)

 

그러다 보니 돌아가신 분을 생각한다면 안락사를 긍정하는 쪽으로 써야 하는데, 저자가 크리스천이 되다 보니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갈등도 표현된다.

 

‘마치는 글’에서 돌아가신 분의 아내와 통화한 내용이 나온다.

남은 사람의 아픔과 상처.

사망 사유를 밝히기 난감하고 호주 현행법을 어겼으니 남편의 죽음을 숨기게 된다고 한다.

유족이 죄인이 된 심정으로 슬픔조차 오롯할 수 없다며.

뭐 나는 그런 죄인 된 심정을 가질 유족이 없으니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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